한국해군사와 백두산함(PC701)
페이지 정보
관련링크
본문
백두산함 PC-461급
1. 개요
"백두산함은 작지 않아.
처음 백두산함을 만났을 때도, 독도함을 보는 지금도.
나는 한 순간도 백두산함을 작은 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백두산함 갑판사 출신 대한해협해전 참전용사(퇴역 갑판 일등준위)[1]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대한해협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어, 교두보인 부산을 지켜냈다.
2. 제원
함종 구잠함(Submarine Chaser)[2]
배수량 450톤
길이 53m
폭 7m
흘수[3] 2m
최고속도 20knot
엔진 2,880 bhp 디젤 엔진
무장 3인치 단장포 X1, 기관총 X2 [4]
승조원 60명
3. 도입 과정
정인귀 제독(예비역 해군소장, 전방위산업진흥협회 진흥본부장)의 증언.
광복 3년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었으나 해군에는 변변한 함정이 한척도 없었다.
원래 대한제국군 해군 소속이었던 광제호와 양무호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일본제국이 멋대로 운영하다가 매각하거나 광복 때 일본으로 가지고 가 버렸고[5]
그나마 유일하게 전투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1947년2월2일 건조된 경비정 한척이 한국이 기획하고 건조한 최초이자 유일한 군함이었다.
이 배는 일본이 패전 후 미완공인 채로 버리고 간 배[6]를
손원일 제독이 조선해안경비대(1946.6.15. 해방병단에서 개칭) 기술진을 동원해
1946년7월17일 진수하였고, 경비정으로 완성시켰다.
비록 배수톤수 287톤, 길이 46.6m, 폭 6.7m, 최고속력 13노트에 불과한 경비정이었지만,
손원일 총사령관은 이듬해 2월7일 이 경비정을 '충무공정'이라 명명했고,
태극기를 게양, 초대 정장에 박홍철 중위, 부장에 함명수 소위를 임명했다.
충무공정은 다음 날 손원일 총사령관과 진해기지 장병을 태우고 진해에서 출발,
통영의 충렬사를 참배하고 한산도를 돌아오는 기념적인 첫 항해를 했다.
충무공정은 그 뒤 '충무공함'으로 개칭되었는데, 해군의 첫 배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였다.
PG-313 충무공정에 대해
하지만 이 배로선 기껏해야 해상 영토 넘어온 일본어선이나 나포하고 밀매선을 단속하는 수준인,
말 그대로 경비정 수준 활약을 하는 정도였다(경비정 맞으니까..).
창군 직후 미해군이 넘겨준 배들도 모두 전투함이 아닌 (본토로 가져가기 귀찮아서 폐기처리하던)
소해정과 상륙정 등 직접적인 해전에 부적합한 함선들이었고,
여기에 M3 37mm 대전차포를 달아 쓰는 실정이었다.
그나마도 포가 부족해 출동 나가는 배들끼리 포 나사를 풀어 옮겨실어가며 돌려 쓸 정도였다.
이렇게 해군에서 제대로 된 전투함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계속되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독자적인 군함 건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에 전투함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결국 손 제독은 함정건조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재원을 마련하여 직접 구입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
1949년6월1일 손 제독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여 '함정건조각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장병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모았고,
손 제독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해군부인회'가 바자회를 운영하여
그 수익금을 기금에 보태었다.
나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모금운동이 확산되어 4개월 만에 1만5천$를 마련했다.
이런 기부금을 받은 정부가 4만5천$의 예산을 보탰고[7],
그 돈으로 함정 구매를 위해 미국에 간 손 제독은
장면 주미대사의 도움으로 10월17일,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백두산함을 비롯하여
PC-702금강산함, PC-703삼각산함, PC-704지리산함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이런 눈물겨운 고생을 하며 얻어온 함 자체는 미국에서도 그냥 처분하려던 수준의 함정이었다.
이 함정 이름은 PC-461급 구잠함으로
미해군에서 2차대전 당시 무려 343척이나 후다다닥 건조했던 함정이지만
무장수준을 봐도 미국 해안정찰이나 하는 연안초계정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전투에서 활약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같은 동급인 PC-565는 당시 독일해군 소속 U보트 1척을 격침시켜
52명 가운데 함장인 대위 1명을 제외한 모두를 전사하게 만드는 활약을 딱 한번 한 적이 있다.
이게 대전기간 동안 전투에서 유일하게 활약한 것.
그 외에는 해안초계나 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이 배들을 노르웨이나 그리스 같은 여러 동맹국들에게 무상제공하거나
아예 민간용으로 팔거나 해군후보생들 실습용으로 쓰이는 수준으로 쓸 뿐이었다.
다만 이건 정말로 세계 기준으로도 못 쓸 폐함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미국이 너무 부유해서 그런 거였다.
미국은 항모나 주력함조차도 연습용, 영화촬영용(!)으로 격침시켜버리는 돈지랄을 해댄 나라다.[8]
즉 후진국들 기준에서는 그럭저럭 주력 전투함으로 쓸 만한 함정이었다.
전투에서 활약한 전적이 별로 없는 건
만들어내고 그냥 계속 만들어내는 미해군 소속인 걸 감안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미해군은 이런 작은 배보다 훨씬 좋은 함선들이 넘쳐났고,
세계대전이 끝난 상태에서 더이상 미국본토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해양세력도 싹다 정리되었기 때문에
구잠함 정도는 정찰/경비용으로 굴리면 족했다.
반면 구축함 정도나 주력으로 굴릴 수밖에 없었던 일본해군이
유키카제와 아오바라는 걸출한 수훈함을 배출한 것이나,
야마토급 아끼기용으로 막 굴렸던 공고급 순양전함들이 연합함대 최고의 수훈함들이었다는 사실들을 보면
전적은 함의 성능보다는 해당 함급이 최전선에 얼마나 자주 나섰냐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손원일 제독은
당시 2,300톤급 PF(Patrol Frigate, 초계호위함.
그 중에서도 여분의 함선이 꽤 있던 타코마급 호위함) 함정을 사려고 했지만
이 배는 미군이 직접 관리하면서 판매를 허락하지 않았다.[9]
결국 살 수 있었던 배가 바로 이 함종.
이 함은 1949년10월에 미국상선사관학교에서 학생실습용으로 쓰다가 폐기하려던 Whitehead호[10]였다.
당시 돈이 모두 6만$였던 손원일 제독 외 인수단원 15명은
이 배를 1대당 2만$로 팔려던 판매자 측과 교섭하여 1만8천$에 구입하였다.
구입한 군함은 뉴욕의 미해안경비대의 부두로 옮겨졌고,
12월26일 오전10시, 함미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정식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이 되었다.
배의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는데 손원일 제독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따와서 '백두산함'이라 손수 명명했다.
공교롭게도 미국에서의 이름도 '화이트헤드', 즉 '백두(白頭)'였으니 기막힌 우연.
정식 인수 후에는 함장에 박옥규 중령을 임명하였다.
백두산함은 이렇게 대한민국 함선으로 편입되었으나,
정식 군함 라인에선 퇴역한지 오래된 실습용 배인지라 운용하기 위해선 거쳐야할 과정이 많았다.
배를 수리하는 일은 현지에서 직접 해야 했고, 승조원들은 배에서 먹고 자면서 손수 고쳤다.[11]
돈으로 고치면서 돈이 부족하면 중고까지 무작정 에누리하면서 사서 손수 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함정으로서 정비를 마친 백두산함은 첫 항해를 시작했고,
1950년1월24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3월에 백두산함 함수에 3인치 포를 장착하였다.
그리고 3월20일 한국으로 향했다.
4월10일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귀중한 첫 전투함이었다.
진해에 도착한 뒤 최용남 해군중령이 백두산함을 인계받고
대기하던 승조원들은 백두산함 운용법과 3인치 포 사용법을 배웠다.
그리고 불빛 신호용으로 12인치 탐조등을,
부무장으로 12.7㎜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장비함으로써 전투함으로서 조건이 갖추었다.
소설 백두산함에 의하면
상갑판 좌우현에 20mm 기관포 2문, 중갑판에 대공화기로 40mm 대공포를 장비했다고 한다.
이 즈음 손원일 제독은
나머지 돈으로 백두산함과 동형함을 한척당 1만2천$에 세척을 더 구입하였으며,
이것이 각각 PC-702금강산함, PC-703삼각산함, PC-704지리산함이었다.[12]
배는 구했지만 백두산함과 함께 구입한 포탄이 불과 100발에 불과하여 이를 함부로 소모할 수 없었다.[13]
실탄사격 훈련은 엄두도 못 내었고,
단지 함포를 닦고 조이고 연습탄으로 조준 및 장전 연습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14]
4. 전과
1950년6월 25일 밤9시경
부산 앞바다를 통해 침투하려는 약 600여명의 북한해군의 육전대를 태운 무장 수송선을 포격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를 대한해협해전이라고 칭한다.
참전용사들의 경험담을 참고하면
북한군 무장선박이 워낙 크고 단단해
백두산함의 3인치 포로는 대충 쐈다간 탄약을 모두 소모해도 격침시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약점을 정확히 노려 사격할 목적으로 피해를 무릅쓰고 지근거리(약 400m)까지 배를 갖다 붙였다고 한다.
이에 북한 수송선은 백두산함에 도선하기 위해 상륙정에 육전대를 태워 띄워보내기 시작했고,
상륙정을 막기 위해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직접 총을 들고 갑판까지 나와 응전해야 했다.
소해정인 YMS-512구월산정과 YMS-518고성정이 달려와 37mm 대전차포를 쏘고[15]
적함 마스트가 꺾여지는 가운데 백두산함의 3인치 포의 고무 스프링이 녹아 고장났다.
화포를 사격하는 과정에서 과열이 되어서 생긴 고장이고,
예비부품으로 교체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으며 이미 예비 부품도 있었다.
그런데 이 대처를 빨리 못한 이유가 좀 서글프다.
앞서 말했듯이 포탄이 너무 부족해서 실탄사격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이런 고장을 접해보지 못해 원인을 빨리 알아챌 수 없었던 것.
이를 알아챈 적함이 아군에게 역공을 가해
백두산함 조타실을 뚫고 자이로 컴퍼스를 때려 아군 2명이 죽고
또 한발이 백두산함 주포 옆을 때려 백두산함에 손상이 갔다.
그래도 접근한 보람이 있었는지 26일01시38분 대한민국해군은 결국 적함을 격침시켰다.
이 전투에서 벌인 성과는 보통 큰 게 아니다.
만약에 이 북한군 함선을 막지 못했더라면
부산에 침투하여 항만 시설을 파괴하고 이를 장기간 점령, UN군의 부산항을 통한 물자양륙을 지연시켜
김일성이 큰소리치던 8.15까지 남한을 모두 차지하는 계획이 정말 이뤄졌을지도 모를 상황이었기에
대단히 큰 활약을 한 셈이다.
일부 경상도 지역에 공비가 침투해 후방전선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 해상침투는 몇건 더 있었으리라 추정되나,
부산항에 직접침투했을 이들을 격퇴한 것은 나머지를 놓친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승리임에 분명하다.[16]
또한, 이는 춘천-홍천 전투와 더불어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간 진격을 중지케 해
시간을 벌게 해준 전투로 언급된다.
다만 대한해협해전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전투가 진짜 북한해군과의 전투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이후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수철수작전에서 2,300명의 국군과 대전에서 후퇴한 미육군 제24사단 패잔병을 수습하고
덕적도-영흥도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1951년2월10일에 있던 제2차인천상륙작전에서도
꾸준히 활약을 했다.
상륙작전 당시 포격만 한 것이 아니라 징발한 민간화물선(LST 문산호) 선원 20명이 상륙부대에서 활약했다.
애초에 상륙 전체 인원이 200명도 안되었기에 쉽게 성공하여 인천을 탈환했다.
5. 퇴역 및 해체
6.25전쟁 휴전 이후 미군이 앞서 말한 대로 PF함을 비롯하여 더 좋은 군함을 여러 지원하면서
안 그래도 크게 밀리던 백두산함은 한국해군에서도 구닥다리로 밀려났고
이후로 후방 경계근무로 빠졌다가 1959년7월1일 퇴역하고 1960년8월21일 해체되었다.
다만 돛대 부분은 보존되어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는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함체가 온전히 보존되어 후대에 유산으로 전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미국처럼 오래된 선박을 보존하면서 유지, 보수하기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이나 해군의 재정능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결국 폐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백두산함은 다행히 대한민국 최초의 군함이라는 가치가 인정되어
폐선과정에서 돛대만이라도 분리하여 보존되기라도 했지,
해군 창설 초기에 들여온 나머지 군함들은
퇴역 후 보존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고철로 사라지거나 사격훈련 표적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17]
6. 여담
나중에 같은 함종으로
3척(PC-702금강산(PC-799), PC-703삼각산(PC-802), PC-704지리산(PC-810))이 전쟁발발 후 도착했는데,
삼각산함은 통영상륙작전의 기함으로 사용될 정도로 이 전투함들 모두가 한국해군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안타깝게도 지리산함은 6.25전쟁 와중인 1951년12월 소해작업을 진행하다
북한군의 기뢰에 접촉하여 격침당하는 참극을 겪기도 했다.[18]
하필 '4번함'인 지리산함이 격침된 이후로 해군은 일절 함명 끝자리 번호에 4를 붙이지 않고 있다.
4자 금기 문제와 겹쳐져 크게 기피하게 된 것.
한국해군으로선 이 보잘 것 없는 연안초계정이 예상 외로 맹활약을 하자 나중에 5척
(PC-705한라산(PC-485), PC-706묘향산(PC-600), PC-707오대산(PC-1145), PC-708금정산(PC-1546),[19]
PC-709설악산(PC-564))을 추가로 사서 배치하기도 했다.
더불어 손원일 제독이 처음 구입하려고 했던 PF함은
한국전쟁 발발 4개월 만에 미군이 거저로 두척이나[20] 한국해군에게 제공했다.
이후에도 PF함 3척[21]을 추가로 들여오고 1952년1월에는 고속어뢰정 PT함 4척까지 미군에게 인수받아
한국전쟁 당시 한국해군의 전력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이 PF함들은 완전한 공짜는 아닌 대여형식이라서 한국해군은 전후에 이 함선들을 정식으로 구입했다.
이 PF함들은 해군이 더욱 유용하게 쓰다가 1970년 퇴역하였다.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고 있는 백두산함의 마스트.
동형의 구잠함들이 세계 곳곳에 랜드되었지만,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들은 없다.
대부분이 방치되어 녹슬어가고 있거나 부두에서 방치되어 있다가 반쯤 침몰된 상태다.#[22]
2020년대 들어 한국의 경항공모함 도입 계획이 논의되면서,
첫 경항모 이름으로 이 백두산함의 이름을 계승해서 부활시키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최초의 군함이라는 역사성도 충분하고 해외사례에서도 함명을 이어받는 전통이 많은지라
대한민국 해군이 1순위로 꼽고 있는 함명 중 하나다.
댓글목록
웅비4해님의 댓글
웅비4해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필자가 미국이 돈을 많이 쓰는 것을 "돈지랄"이라 했다
부자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건 가난을 면치 못한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를 존경하고 부자에게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