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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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제작, 반포하였어도 아녀자의 언문 정도로 천대받아
최초 국한문혼용 신문 한성주보 1886년2월22일 자.
1890년대 영.미선교사들의 한글 번역성서
'한글날' 역사,
조선총독부가 한글교과서 만든 이유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인터뷰 ft.
틀리기 쉬운 우리말 50 바로쓰기
나의 패랭이역프로필에서 2022.10.10.17:35
한글날, 1926년 처음 기념식 거행.
1946년부터 10월9일 공식 날짜로 지정
한글날 역사
1926년 첫 명칭은 가갸날,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세종실록에 근거해 11월4일(음력 9월29일)에 처음 기념식을 거행했다.
당시 명칭은 '가갸날'이었다. 한글반포 480주년이었다.
1929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개명
1931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해 양력10월29일로 정함
한글날 확정 10월9일은 훈민정음 완성한 날
1940년에 발굴된 훈민정음해례본에 '세종28년9월 상한 훈민정음을 완성했다'는 구절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해 양력 10월9일로 지정했다.
일제강점기 끝난 뒤 1946년 공휴일 지정
10월9일을 공식 날짜로 지정하고
194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첫 제정하면서 공휴일로 지정됐다.
박정희 대통령 한글 공문서 시행, 한글 국보 지정
공문서를 한글로만 작성하게 했고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세웠다.
1962년 한글을 국보 제70호로 지정했다.
노태우 대통령 1991년 한글날 공휴일 취소
10월에 통상 추석연휴가 있으며 개천절(3일) 등 쉬는 날이 너무 많아 경제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
노무현 대통령 2006년 국경일로 격상
2009년 문체부가 공휴일 제안했지만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 등이 경제 및 생산성 저하 등을 우려해 반대했다.
이명박 대통령 2013년 법정공휴일로 지정
세종대왕 동상을 세종문화회관 앞에 설치했다.
북한에는 조선글날 1월15일
1443년 한글 창제일을 기준.
실록에 훈민정음 창제 기록이 나온 12월 말을 양력으로 환산해 지정했지만
푸대접 받아오다가 김정은 집권 이후 달력에서 빠졌다.
22년 동안 ‘평일’이었던 한글날, 역시 ‘이 대통령’ 때 빨간날 됐다
빨간날에서 사라지는 등 비운을 겪었던 한글날을 다시금 공휴일로 만든 인물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이었다.
한글 신문, 교과서, 성경, 소설
1. 최초 국한문혼용 신문 한성주보 1886년2월22일 자.
2. 세계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1890년
<사민필지>는 관리와 백성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세계지도 각국 정부형태 지형 풍속 산업 교육 종교 군사력 등을 망라하였다.
어려운 한자로 된 교과서로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였다.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890년에 출간한 한글전용교과서.
띄어쓰기가 없는 한글을 개조하며 세계 최초의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었다.
3. 케임브리지 대학에 소장된 한글성경. 1882년에 시작되어 1910년에 마무리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한자를 익히지 못한 여성, 하층민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수단이 되었고
처음으로 대중이 문자의 주인이 되었다.
4.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1923년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보통학교(초등학교) 우리말 교과서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어가 국어였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불렀다.
조선총독부(저작 겸 발행),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번각발행겸인쇄),
대정12[1923]년7월10일(번각발행); 22.0×15.1c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1923년)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1 (1930년)
5. 일제시대 딱지본소설(육전소설)들과 영화포스터들
“울긋불긋한 표지가 독자들의 호기심과 구매욕을 자극한다.
호롱불 밑에서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서 보기에도 눈이 아프지 않을 만큼 큰 활자로 인쇄되어 호감을 준다.
값이 싸서 농민과 노동자라도 한두권쯤은 사 볼 수 있다. 문장이 쉽고 고성대독하기에 적당하다.”
당시 문학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한 말이다.
딱지본 소설은 한권 값이 6전이어서 일명 육전소설이라고도 불렸다.
1. <구마검>(대한서림)의 표지.
1908년12월. 한국 최초의 만화가로 꼽히는 관재 이도영(1884~1933)이 표지화를 그렸다.
2.<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란가>(춘양사)의 표지.
1934년12월5일. 유명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3.<이수일과 심순애>(보문관)의 표지.
1925년3월10일. 당시 유행하던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영화포스터
6.조선어 표준말 모음(조선어학회 조선어표준어사정회 1937)
7. 초등 국어교본 중 (1946년)
주시경 학술상을 받은 <한글의 탄생> 저자 노마 히데키 씨 인터뷰(2017)
노마 히데키 씨(메이지가쿠인대학 객원교수)는
일본 베스트셀러였던 <한글의 탄생>으로 아시아·태평양상 대상과 주시경학술상을 받았다.
―'한글의 탄생'(2010년)은 일본에서 한글에 관한 첫 대중 학술서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일본인은 한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한글이 가진 지적 재미나 풍요로움에 대해 전혀 몰랐다.
... 사실 내 책에서 새로운 관점이 있다면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렸던 최만리(崔萬理)의 '사대주의'에 관한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언문'을 만든 것은... 여섯가지 이유를 들어 부당하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최만리는 '악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상소문에서 '용음합자(用音合字·음으로써 글자를 만듦)'라며 창제원리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높은 지적 수준을 보여준 대목이다.
세종과의 핵심 갈등은 바로 ‘언어론’의 차이였다. 사대주의가 아니었다."
―무슨 뜻인가?
"당시 왕과 신하는 오늘날 현대 언어학 수준의 논쟁을 벌였다.
그 시절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장면을 찾아볼 수 없다.
최만리는 다른 형태의 언어(훈민정음)는
한자로 축적된 모든 지식과 향후 지적인 활동의 근간을 무너뜨릴 것을 우려했다.
사회체제를 바꾸는 혁명(革命)처럼 위험하게 본 것이다.
세종은 파직한 최만리를 며칠 뒤 용서한다. 만약 정치 문제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뒷날 최만리가 '사대주의자'로만 매도된 이유는?
"일제강점기 한글학자 최현배 같은 분에 의해서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사대주의가 겹쳤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만 보고 있으면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많다."
―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자라 자부할 만한가?
"'세계 최고' 같은 수식어에 집착하면 사고(思考) 정지 상태에 빠지기 쉽다.
문자체계는 스포츠도 아니고 상품도 아니다. 순위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어떤 문자든 그걸 쓰는 사람에게는 가장 귀한 문자가 될 수 있다.
'한글은 과학적'이라는 표현도 좀 애매하다.
널리 쓰이고 있는 문자치고 '비과학적인 문자'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글과 다른 문자들의 차별적 특성은 뭔가?
"한글은 창제 과정을 알 수 있는 희귀한 문자체계다.
가령 자음(子音)은 발성기관에서 형태를 찾아내 이론화했다.
논리의 결벽성이랄까, 논리 자체가 그대로 형태가 된 것이다.
규격화된 글자체로 백성들이 작대기로 땅바닥에 쓸 수 있다.
오히려 붓으로 쓰기에 쉽지 않다.
산수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마치 컴퓨터 그래픽이 등장한 것과 같다.
실제 한글은 typography로서 다양한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
―미적(美的) 관점에서 한글과 일본글의 차이는?
"질감(質感)이 다르다고 할까. 시각적으로 한글은 단일하다. 여러 나라의 문자들이 단일한 편이다.
반면 한자·가타카나·히라가나 등이 섞인 일본글은 복합적이며 다색적(多色的)이다."
―효용성을 비교하면?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 문자체계만으로 효용성을 판단할 수 없다."
세종과 최만리는 현대언어학 수준의 논쟁.. ‘사대주의’가 핵심 아니었다 - 최보식 의 언론
한글날이다. 특히 글로써 밥벌이를 해온 나는 이날을 존중해야 한다.
2017년 나는 도쿄에서 노마 히데키씨(메이지가쿠인대학 객원교수)를 만났다.
외국인의 눈으로 ‘한글’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노마 히데키...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어 한글을 보급한 이유
1912년 : 우선 한글철자를 정리하고 통일
고쿠분, 시오카와, 신조, 다카하시, 강화석, 어윤적, 유길준, 현은 등이 위원이 돼
1912년4월에 한글철자법을 정했다.
1921년 한글맞춤법 수정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大要)”로서 개정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권덕규, 신명균, 심의린, 정열모, 최현배 등 주시경 문하생들이 참여하여
한글맞춤법을 수정하며 현대적 한글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이후 남과 북에도 한글맞춤법 기초가 되었다.
1936년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계속해서 한글 진화를 모색했다.
1941년까지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관련 통일안을 발간하여왔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장려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한 것은
한글연구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한글을 통한 민족주의 함양,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보급하는 것에 대한 탄압이었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그런 연장선상이었다.
체포는 좌익계열 독립군의 후원을 받았다는 죄명이었다.
일본어를 보급하려며 한글부터 익히게 해야
세종이 한자 발음기호 창제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듯
조선인이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일본어 습득 매개체인 한글습득이 필수적이다.
일제 때 한글문학 작품이 중단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1943년 폐간되기 전까지 한글로 발행되었고
월간조선의 전신인 잡지 “조광”은 일제 패망 때까지 한글로 발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는 해방될 때까지 한글로 발행되었다.
출처: 정문님 글 발췌
적어도 한글날에 토착왜구라는 소리는 듣기 싫다.
그러다 보니 이 글은 매년 한글날 하루 지나서 포스팅하게 된다.
박용태
한글날에는 한글만 사랑하자. 어설픈 국뽕은 이제 그만...
한국의 애국자들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대하여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 2,900여종의 언어 가운데 유네스코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이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나 또한 쓰기 편하고 다양한 표현이 자유자재인 한글의 우수성으로
참 많은 유용함과 편리함을 즐긴다.
특히 나처럼 페북에서 수다쟁이 글쓰기를 하는 스타일에게는
단.언.컨.대, 한글만큼 좋은 글자는 없다.
문제는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꼭 한번씩은 걸고 넘어지는 것이 일본문자인 가나(仮名)이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한글만큼 편리하지는 않은 것 같고, 소리에 대한 표현도 풍부하지 않은 것 같기는 하다.
거기에 훈독과 음독이 서로 달라 읽는 것조차 매우 애로점이 많다고 한다.
이것에 비해 한글은 정말이지 과학적인 우수한 글자가 맞다.
한국의 애국자들은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꼭 일본의 가나와 비교하고
일본문자가 가지는 불완전성을 마치 일본전통문화의 열등성을 대표하는 것 인양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말이다.
이 일본문자인 가나가 만들어진 시기는 헤이안 시대인 9세기이다. 우리로 치면 통일신라 말기이다.
한글인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것은 이보다 5백년 후인 15세기이니 이 기간 동안 한국은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
5백년이란 역사는 엄청난 기간이다.
마치 5백년 전 세계 최첨단의 무기가 조총이었다면,
5백년 후인 지금의 최첨단 무기가 스텔스 전투기이니 문자가 있고 없던 5백년간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는
조총과 스텔스 전투기의 차이가 난다고 비유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당연히 지나친 비약이다.
하지만 이 5백년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들어
일본 가나의 열등함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것 또한 조총과 스텔스기를 동일 시대에 놓는 엄청난 비약 아닐까?
비록 가나가 너무(?) 이른 시기에 만들어져 한글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겠지만
본래 문화와 언어, 그리고 문자는 발에 신발을 맞추듯, 또는 가끔 신발에 발을 맞추듯
상호호응하며 융합되다 보니 정작 일본인들은 우리가 비웃는 것만큼
가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없는 듯하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개무시하는
몽고의 문자는 13세기에, 거란문자는 10세기에, 여진문자는 12세기에 만들어진다.
한글은 중국 음운학을 바탕으로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산스크리트어와
위의 오랑캐 문자 등을 참조하여 15세기에 만들어진다.
한글은 그만큼 후대의 글자이고 선행한 많은 문자들을 참조하여 만든 글이다 보니
당연히 과학적이고 우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글보다 5백년이나 앞선 일본의 문자와 문화를 과연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5백년 뒤의 문자가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언어학적 우월성이야 당연하지만
역사적 우월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문자뿐만 아니다.
우리의 최초 역사서는 12세기 <삼국사기>이다.
<삼국유사>는 거의 1백년 후인 13세기 저작이다.
이에 비해 현존하는 일본의 역사서는?
7세기 고사기(古事記)가 편찬되고 8세기인 720년에는 <일본서기>가 편찬된다.
무려 우리와 4백년의 차이가 난다. 대단한 기록문화의 나라인 것이 분명하다.
물론 고사기 같은 경우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신화적인 요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단군신화가 실린 <삼국유사>와
13세기 <제왕운기>도 별반 다르지 않는 것 아닌가?
한국인이 한글과 한국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일본 문자와 문화와 비교하여 그 우수성을 역설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식민지배의 트라우마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독립운동은 못해도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될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독립운동은 식민사관의 미러링에 불과한 것이다.
식민사관의 미러링으로 식민역사를 극복한다고? 에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원나라 라마승 Phags-pa(八思巴)가 티베트 문자에 기초하여
원나라의 말을 나타내기 위하여 네모꼴로 만든 음소문자인 13세기 몽고의 파스파 문자이다.
파스파 문자가 훈민정음 즉 우리 한글의 기원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우선 두 문자 모두 소리글자고 고려시대부터 몽골어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몽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
성삼문이 한글 창제 작업과정에서 명나라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 등 때문에 그렇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스파 문자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김흥식)
틀리기 쉬운 우리말
1. 거에요 → 거예요
2. 구좌 → 계좌
3. 끝발 → 끗발
4. 나날히 → 나날이
5. 남여 → 남녀
6. 눈꼽 → 눈곱
7. 닥달 → 닦달
8. 대중요법 → 대증요법
9. 댓가 → 대가
10. 더우기 → 더욱이
11. 두리뭉실 → 두루뭉술
12. 뒤치닥거리 → 뒤치다꺼리
13. 뗄래야 → 떼려야
14. 만듬 → 만듦
15. 머릿말 → 머리말
16. 몇일 → 며칠
17. 바램 → 바람
18. 배개 → 베개
19. 비로서 → 비로소
20. 빈털털이 → 빈털터리
21. 상승율 → 상승률
22. 생각컨데 → 생각건대
23. 섥히다 → 설키다
24. 승락 → 승낙
25. 아니예요 → 아니에요
26. 아뭏든 → 아무튼
27. 안되 → 안 돼
28. 안밖 → 안팎
29. 알아맞춰 → 알아맞혀
30. 어떻해 → 어떡해
31. 오랜동안 → 오랫동안
32. 오랫만에 → 오랜만에
33. 왠일 → 웬일
34. 윗어른 → 웃어른
35. 윗층 → 위층
36. 유모어 → 유머
37. 일찌기 → 일찍이
38. 잇점 → 이점
39. 자그만치 → 자그마치
40. 자랑스런 → 자랑스러운
41. 째째하다 → 쩨쩨하다
42. 쪽집게 → 족집게
43. 천정 → 천장
44. 촛점 → 초점
45. 칠흙 → 칠흑
46. 통털어 → 통틀어
47. 하건데 → 하건대
48. 하마트면 → 하마터면
49. 하십시요 → 하십시오
50. 할려고 →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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