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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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우리 역사를 세계사와 포개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기웅 기자 2021.08.05 10:06:54
김용삼 대기자의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3·4권 출간
제3권 『강화도조약·임오군란의 뒤안길』, 제4권 『영국·러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파장』
한 시절 천동설(天動說·geocentric theory)이 시대의 정의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다른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이론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운동을 한다는 지동설(地動說·heliocentric theory)을 내놓았을 때 인류는 경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목록에 올랐고,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가택연금을 당했고, 그의 모든 저서도 금서목록에 올랐다.
중세 천주교 시각으로 보면 지동설은 이단이 되듯, 우물 바닥에 앉아 하늘을 보면 하늘은 우물 크기로 보인다.
이 나라 국사학계가 빠져 있는 ‘一國史적 관점’의 역사해석은
중세 천주교 시각, 우물 바닥에 앉아서 하늘 보기를 강요하는 파시즘적 광기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역사해석에 반란을 일으킨 책이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김용삼이 저술하고 있는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다.
총 10권으로 기획되어 2022년 연말 완성예정인 이 시리즈는
일국사적 관점을 뛰어넘어 철저하게 세계사적 시각, 동아시아 관계사적 시각에서 우리 근대사를 해부하여
우리는 누구이며, 근대국가 대한민국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찾아가는 역작이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아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느냐(개구), 닫느냐(쇄국)”의 두 가지였다.
이 땅의 사람들을 두 패로 갈라서게 한 모든 반목의 밑바탕에는
쇄국 대 개국이라는 두 가치관의 충돌이 깔려 있다.
일본이 철포(화승총)를 받아들일 때 조선은 서원을 만들었다.
일본이 나가사키를 열 때 조선은 쇄국의 빗장을 닫아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 총체적 결과물이 1910년의 대한제국 망국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수많은 사료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강화도조약, 영국의 배후조종의 결과물
지난해 이 시리즈의 제1권 『한반도의 깊은 잠』,
제2권 『개항 전야』가 출간되었고,
이번 여름에 제3권 『강화도조약·임오군란의 뒤안길』,
제4권 『영국·러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파장』이 발매되었다.
이번에 발매된 제3권은 일본이 조선을 겁박하여 강제개항시킨 강화도조약은
영국의 배후조종에 의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일본이 1874년 타이완을 침공하자
영국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확보한 자신들의 이권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게 “조선으로 진출하라”고 강요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은
일본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한반도 남진을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고단수 以夷制夷 책략이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책략 덕분에 일본은 1875년 雲揚號를 조선해역으로 보내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고,
1876년 드디어 조선을 개항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일국사적 국사학이라는 늪에 빠진 한국인들만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
수많은 연구자와 전문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세계사와 우리 근대사를 한 눈으로 읽어내면
동양에서는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대체 조선은 왜 “착취할 것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렸는지가 명쾌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인 한글 창제국,
천문우주 기상학의 빛나는 성과물인 측우기와 해시계를 발명한 나라라는 프라이드가 하늘을 찌를 듯 높다.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지식혁명의 월계관은
고려와 조선이 아니라 그들보다 100년 후 금속활자를 만든 구텐베르크에게 돌아갔을까?
측우기와 해시계 발명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성에서 동아시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금속활자 선진국에서 지식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서양에서 인쇄출판은 개인사업자들의 영역이었다.
구텐베르크는 1450년 마인츠에 인쇄소를 차려 세계최초로 『구텐베르크 성서』를 대량 인쇄하여 판매했다.
그전까지 성서는 수도원에서 신부들만 볼 수 있는 ‘귀하신 몸’이었으나
구텐베르크 덕분에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는 책’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어서 음란서적을 대량으로 찍어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인쇄업자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대량의 서적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함으로써 서양에 지식혁명이 폭발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금속활자는 국가의 독점소유였고, 민간은 활자의 주조나 소유가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세계 최초·최고의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국왕과 관료들에게 필요한 책을 한정된 수량만 인쇄했다.
그 결과 서적은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고가사치품이 되었다.
중종 시절 『대학』, 『중용』 같은 서적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상업유통이 불가능했다.
인쇄출판과 서적유통을 통한 지식과 정보는 특정 양반 관료지배층이 독점했고,
일반 백성들에게 지식과 정보의 유통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구텐베르크 덕분에 서양에서 지식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 조선은 무지와 무식이 지배하는 야만의 왕국으로 추락했다.
그 결과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이 나라의 문맹률은 78%였다.
글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쉽게 배워 쓰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시기는 1443년이다.
하지만 한글 창제에 앞장섰던 집현전 학자들마저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식한 글자”라고 멸시 비판하고 사용을 거부했다.
한글이 지구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대체 조선양반들은 한글을 발명하고도
450년 이상을 배우기 어렵고 사용하기 어려운 중국문자인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글이 정부 공용문자로 공식채택된 것은 좌파 학자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개혁”이라고 기피 혐오하는 갑오경장 시절인 1894년11월21일이다.
이날 갑오개혁 정부는 칙령 제1호로
“법률명령은 국문으로 본을 삼고 漢譯을 부하며,
국한자를 혼용함”이라는 법령을 공포하여 창제된 지 451년 만에 한글이 공용어로 예우받게 되었다.
전 국민에게 문자교육이 실시된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보통학교 교육제도가 도입된 후의 일이다.
의사·역관이 주도한 개혁·개방
참으로 한심스런 일이지만,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발견하고 그것의 보급과 연구, 발전에 앞장선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무슨 논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당대의 세계패권국 영국의 배후조종으로 추진된 강화도조약체결 과정에서
중인 역관 오경석의 흥미로운 행동이 발견된다.
대대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오경석은
통역을 위해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을 13차례 오가는 과정에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출중한 외국어 실력, 풍부한 재력, 선구자적인 근대화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중인 신분이었다.
중인들은 고질화된 양반-상놈의 강고한 신분제도를 무너뜨리고
능력과 실력에 따라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조선은 자생적인 힘으로 기존체제를 무너뜨릴 개화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니
외세의 충격을 통한 개화·개혁·혁명의 길을 추구한다.
오경석은 동지사 겸 사은사 정건조의 수석통역관으로 베이징에 파견된 1874년3월6일,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 서기관 William F. Mayers를 찾아가
“유럽 열강이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정부의 은둔을 깨뜨려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조선의 개화를 이끈 역관 오경석. 국내에 자생적으로 개화를 이끌어갈 세력이 없었기에
오경석은 서양의 힘을 끌어들여서라도 조선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개화를 이끈 역관 오경석. 국내에 자생적으로 개화를 이끌어갈 세력이 없었기에
오경석은 서양의 힘을 끌어들여서라도 조선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경석은 다음해인 1875년2월 다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메이어스를 찾아가 군함과 함포를 동원하여 조선을 개국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오경석은 조선의 문호개방은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판단했다.
이 와중에 조선의 양반 위정자들은 세계정세 돌아가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위정척사, 쇄국으로 일관하면서
나라 망할 때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오경석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위해 나타난 일본 외교관들에게 조선의 주요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이 기회에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을 강제 개국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조선의 개화세력은 이처럼 혁명적 사고를 가진 의사·역관에 의해 추동되었고,
그들에게 포섭된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 청년양반 개화세력이 태동한다.
이들 양반 개화세력도 조선 내부에 자생적 개화·개혁·혁명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에
오경석과 같은 醫譯중인들과 마찬가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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