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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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음'이라는 뜻으로,
기원전 213년과 기원전 212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하나로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탄압책으로
중국에서는 분갱(焚坑)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진시황제는 이전까지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군주였다가
이 사건 하나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실제로도 이후 폭군의 행보를 걷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다.
후에 항우는 초한전쟁 중 주가 등의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자
"시황제 그놈이 왜 그렇게 너희들을 탄압했는지 알겠다."며
이기기만 하면 이것을 벤치마킹 하려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항우의 성격과 신안대학살을 봤을 때,
만약 천하를 얻은 자가 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면 진짜 실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시경), 서(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焚書)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坑儒)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
그게 아니어도 실상이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대개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는 책봉을 받아 특정지역을 대대로 다스리는 대리인을 필요로 하여 지방의 자치적인 질서를 용인하는 반면,
군현제는 전국통치를 황제가 임명하는 지방관을 통해 철저히 황제와 직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유가(儒家)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禮)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법가(法家)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관계 혹은 혈연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고인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秦)나라는 4세기 상앙의 변법 이래 법가(法家)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통일, 도량형통일, 도로규격의 통일 등을 추진하였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상적 통일을 꾀하는 과정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일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은 전혀 둘로 나누어볼 인물이 아니다.
역사 저술을 불태운 것 또한 진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래 역사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책으로 철저히 관의주도에 의해 쓰이는 책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으로 각국이 저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역사서가 존재하는 상황은
세계 유일의 황제를 추구하던 진의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분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진(先秦) 시대의 역사서가 춘추, 국어, 죽서기년 정도만 남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에겐 탄식 거리지만.
춘추전국시대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제자백가의 서책들과 대부분의 역사책이
불타버려서 현재 전해지는 것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분서갱유로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아예 소실된 책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파고 책을 숨기는 등 법을 피해 책을 지키려 필사적이었다.
참고로 이 무렵에 사용된 책은 당연하겠지만 간독이었다.
분서갱유는 유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역사나 문화 전방위적으로 행해졌다.
다만 일각에선 분서갱유 과장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분서갱유 항목 그러나 출처가 불명확하여 지지하는 학자가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위키백과 영문판의 Reasons for skepticism 단락 각주에 따르면
Martin Kern, Michael Nylan 등의 학자가 주장한 관점이다.
서적 탄압을 피해 유생들이 서적을 숨기거나 아예 암송하는 식으로 대처했는데도
그전 기록이 아예 통째로 소실된 수준까지 간 건 진시황 만큼이나 항우의 탓도 컸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지나가는 길에 고을이 있는 족족 학살로 쓸어버리는 것에 휘말려서
책 내용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
실제 나라에서 책을 모두 관리하는 방식으로 거두어갔다면 그 책들 거의 대다수가 함양에 있을텐데
그 함양에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게 다름아닌 항우다.
또한 분서는 둘째치고 갱유도 과장된 것이,
고제 밑에서 예법을 부활시키고 유학을 다시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숙손통만 해도
2대 황제인 호해 밑에서 눈치보면서 일하고 있었다.
그외에도 유학자 여러명이 호해에게 진승의 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봐선
유학자라고 모조리 죽이거나 한 것은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진나라 밑에서 알아서 눈치보고 숙이는 유학자들은 최대한 봐주고 살려줬다고 봐야 한다.
덧붙여 분서갱유가 유명해 그렇지
자기네 사상과 맞지 않는 책을 없애는 일은 역사 속에서 많이 존재했고
심지어 조선에서도 태종때 음양의 술수니 뭐니 하는 건 허황된 거라며
이에 해당하는 책을 소각할 것을 지시한 기록이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사건이다.
그 증거로, 분서의 풍파 때문에 현전하는 중국의 고서 중에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것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건국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고대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기억과 기록의 대립이었다.
기본적으로 간독은 필사본이고, 대부분은 외운 유학자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경전들이 복원되었다.
이 시대에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책 몇권씩 외우던 것은 학자들이라면 다 달고 있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심지어 고대 바드들은
문자 없이 자기 머리 속에 책 몇권에 해당하는 지식을 욱여넣고 지식계층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생매장 당한 460명의 학자들은 중국 전토 기준으로 많은 숫자도 아닌 덕에
그 정도의 피해는 복원할 수 있었다.
결국 한나라 초기에는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의 4경이 모조리 복원된다.
주역은 애초에 점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고,
악경은 발견되지도 암송되지도 않아 영구히 소실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각 복원본마다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책을 외운 사람들끼리도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고,
필사본 시대에 작성된 책이라 글자가 좀 다르다던지 해서 내용이 바뀌는 일도 흔했다.
결국 이걸 정리해서 논리화 하는 학문이 필요했는데 이게 바로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훈고학(訓詁學)이다.
이 훈고학으로 성립된 사서삼경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시경의 삼가시와 금문상서가 있었다.
이후, 시경과 효경, 예기, 춘추 등은
노공왕(? ~ 기원전 129)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과두문자로 쓰인 공자 대 원문이 발견되면서
원전을 보존하고 있다.
다만 고문경은 전한 시대에는 위서가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금문경이 대세를 차지하고 동중서 등의 유가 정책도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으나,
전한 말 유흠이 고문을 정리하면서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고문경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또한 이런 전례들 덕에 동양의 도서보존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가령 "집을 고치려고 벽을 허물고 들보를 들어내 보니 책이 숨겨져 있더라."하는 일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대부터 일어난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비기(祕記) 떡밥이 이렇게 일어난 것으로
분서갱유로 사라진 경전을 학자들이 기억력에 의존하여 복구함으로써 금문이 형성되었으나,
학파마다 복구된 내용이 달라 논쟁이 일어나는 찰나에
저런 식으로 숨겨 두었던 책이 발견되자,
발견된 책들이 원전이라고 권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와 고문이 형성된 것이다.
시경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6편이 실전되었고, 모형과 모장이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을 《모시》(毛詩)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고문시경의 발견 이후에는 금문시경이 묻히는 바람에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한시만 본전이 아닌 외전이 10권 전한다.
반면, 상서는 오히려 금문경이 어찌어찌 현대까지 전해졌으니,
오히려 다른 책들과 같이 노공왕이 찾은 고문경의 원전이 소실됐다.
중간에 동진의 매색이 고문경을 다시 찾아서(?) 바쳤고 상당기간 진본으로 인정받았으나
후세에 위작임이 밝혀져 '위고문상서'라 하여 원전의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 뒤 중국에서는
이후로도 이러한 문자의 옥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문화탄압이 더 일어났다.
정작 본 목적이었던 불온사상 탄압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진나라의 멸망을 이끈 유방과 항우는 둘 다 유학을 경멸한 인물이었고,
한나라 건국 이후 유학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유지에 이용되었다.
때문에 설령 분서갱유가 과장이라고 해도 결국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러한 중국식 사상탄압의 선례를 남긴 악영향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댓글목록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분서갱유(焚書坑儒-책을 불 태우고 학자를 묻었다)는 과하고
분유갱서(焚儒坑書-유학책을 불살라 땅에 묻었다)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