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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1-02-12 18:39 View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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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 때문에 몸이 달은 벽계수 (3)ㅣ썸랩
네이버 연애결혼 2019.07.08.11:01

그시절 그연애
자부심 강한 황진이가 썼던 주옥같은 시조들

황진이와 벽계수의 로맨스는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과장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해프닝은 있었으나 로맨스는 없었다.
벽계수가 실존 인물인가 하는 점이 의문이 되던 때도 있었으나, 
중종 때 벽계도정 벼슬을 지낸 이종숙이 벽계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세종대왕의 증손자가 된다.

벽계수는 평소 황진이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꼭 만나보고 싶었으나 
황진이는 풍류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않았다. 
몸이 달은 벽계수가 이달을 만나 꾀를 구했다. 
이달은 기생을 어머니로 둔 서출로 여러 기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파격적이라면 손에 꼽힐 허균조차도 이달이라면 머리를 흔들 정도였다. 
황진이와 금강산 기행을 같이 간 이생이 이달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기생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이달이니 교묘한 계책을 내주었다.

“공이 황진이를 한번이라도 보고자 한다면 내 말을 따라야 하는데,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꼭 그대로 하겠네.”
“공은 나귀를 타고 어린 아이에게 가야금을 지니고 따라오게 하십시오. 
그렇게 진랑의 집을 지나 누각에 올라 술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면서 가야금을 타면 
황진이가 필시 공의 옆에 와 앉을 것입니다. 
이때 황진이를 본척 만척 하면서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 올 것입니다.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황진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만사는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입니다.”

벽계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과연 모든 일이 이달의 말처럼 이루어졌다. 
벽계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취적교에 도달했다. 

취적교는 개성 남쪽에 있는 다리로 그 이름은 피리를 부는 다리라는 뜻이다. 
옛날 동진 시절의 은거기인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죽림칠현 중 한사람인 혜강이 죽은 후에 
그의 친구였던 상수가 혜강을 그리워하며 피리를 불었다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헤어짐을 슬퍼하고 옛날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황진이는 이 다리에서 가야금을 든 아이에게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서 벽계수라는 답을 얻었다. 
그러자 황진이는 즉석에서 시조를 지어 창을 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망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노래가 절묘하고 황진이의 노랫소리는 더더욱 절묘하니 
벽계수는 그 소리를 뿌리치고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황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리다가 
그만 나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서양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사이렌이 있다고 하던데 
조선에는 선비의 마음을 홀리는 황진이가 있었다.

황진이는 나귀에서 떨어진 벽계수를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다. 풍류랑일 뿐이다.”
그러더니 황진이는 홱 돌아서서 떠나버렸다. 
벽계수는 창피한 마음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황진이에게는 종친이라는 신분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녀는 예술을 찾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황진이의 시조는 
가람 이병기가 “4백년 전의 황진이의 시조는 실로 완벽을 이룬 것”이라고 평가할만큼 뛰어나다.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뒤에 지었다는 시조를 한번 보자.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우러예어 가는고.
 
청산이 황진이를 상징하는지, 녹수가 황진이를 상징하는지를 놓고 
오늘도 학자들은 설왕설래를 하고 있다. 
그만큼 상징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황진이의 한시 중에 가곡으로도 유명한 <상사몽>도 있다. 
김억이 옮기기를 이렇게 한 바 있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길 따라 그 님을 만나러 가니
길 떠났네 그 님은 나를 찾으려
밤마다 어긋나는 꿈일 양이면
같이 떠나 路中에서 만나를 지고

서경덕과 재치 넘치게 주고받은 시도 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가리켜 이런 시를 쓰자,
 
마음이 어리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찌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가 그인가 하노라.
 
황진이는 이렇게 화답했다.
 
내 언제 신의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대
달 지는 삼경에 님 찾을 뜻이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
 
사랑하던 이사종과의 헤어진 뒤 그를 그리며 쓴 시조도 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마지막 행의 “얼운 님”은 
“어르신”이라는 뜻도 되고 “정을 통하다”는 뜻고 있고 “추위에 얼은”이라는 뜻으로도 풀 수 있다. 
싯구의 사용이 절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황진이는 불행히 마흔 즈음에 숨을 거두었는데, 죽을 때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산골짜기에 묻어 쓸쓸히 만들지 말고 길가에 무덤을 지어주시오.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 곡은 제발 하지 말고 풍악을 울려 길을 안내하시오.”

황진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일찍이 화담 서경덕에게 송도에 삼절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 
화담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박연 폭포와 선생과 접니다.” 라고 말해서 화담이 웃었다 한다. 
허균 역시 황진이가 여자 중 빼어났으니 그녀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다라고 인정한 바 있었다.

조선 末에 이르면 
유교적 관점에서 황진이를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고 
그런 결과 황진이가 죽으면서 자신의 일생을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황진이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이문영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역사를 전공하면 평생 소재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사학과에 진학한 이후 지금까지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역사물로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사마천, 아웃사이더가 되다>, <신라탐정 용담> 등을 썼다. 
역사물 이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현재 로맨스소설 전문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재직 중이다.

댓글목록

웅비4해님의 댓글

웅비4해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마음이 여려지니 하는 일마다 어긋난다
70평생 배우고 겪은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
지나는 말투에 혹해서 '그래 그러자' 하고 나면
다시 빠꾸 오라이 하기 일쑤다
마음이 약해지면 자신을 잃고 후회하는 일도 생긴다
하던 대로 하자, 고집 잃으면 색갈생각 바꾸면 끝이다
조금 먹고 조금 보고 조금 듣는 것도 자연의 한 부분이다
그러라고 치아 눈이 귀가 5감이 그렇게 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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