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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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좌파, 부산이 우파면 중도는? 그게 대전이라 여기는 文
중앙일보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2020.12.01 05:00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진보와 보수,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졌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그런 쪼개짐을 더욱 부추긴다.
확고한 지지층을 잡으려면 ‘국민적 대립’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게 정권 연장에 이익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영의 패러다임을 ‘절대 진리’라고 믿으며 강고한 깃발을 올린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표적을 만들어 ‘적’으로 몰아세운다.
그러면서 스스로 ‘진보’라고 말한다.
그들의 진보는 닫혀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들의 이념은 점점 굳어서 박제가 되고 있다.
이유가 있다. 그들이 ‘中道’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보에 ‘중도의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중도를 모르는 진보는 아집에 불과하고, 중도를 모르는 보수 역시 아만에 불과하다.
그들은 “좌와 우의 중간이 중도다. 중도는 기회주의이고, 회색분자다”라고 말한다.
이념의 틀에 갇힌 이들은 그런 식의 기계적 사고를 뛰어넘지 못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철로가 있다.
가령 부산역을 ‘좌파’라 하고, 서울역을 ‘우파’라 한다면 중도는 어디쯤일까.
이들 중 열에 열은 “대전역”이라고 답하지 싶다.
아니면 “대전역을 중심으로 인근 역까지 포함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서울역과 부산역, 그 사이의 중도는 어디인가. 그곳은 대전역이 아니다.
중도는 '기계적 중간'이란 의미를 뛰어넘는다. [중앙포토]
틀렸다. 중도를 막연히 ‘좌파와 우파의 중간’, ‘서울과 부산의 중간’이라고 여긴다면 큰 오해다.
그건 좌파, 혹은 우파의 기준에서 본 중도일 뿐이다.
그건 평면적인 중도, 2차원적인 중도, 기계적인 중도일 따름이다.
엄격히 말해 그건 ‘우유부단’이고 ‘두루뭉수리’이지 ‘중도’가 아니다.
중도의 가슴은 그렇게 좁지 않다. 중도의 세상에 그런 중도는 없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울역과 부산역이 있다. 그럼 중도는 어디쯤인가?” 답은 “대한민국 전 국토”다.
다시 물어보자.
“남한과 북한이 있다. 중도는 어디인가?” 답은 “한반도 전체”다.
다시 물어보자.
“민주당과 공화당이 있다. 중도는 어디인가?” 답은 “아메리카”다.
그럼 답이 나온다.
중도의 대통령은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가 말이다.
중도의 대통령은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아니라 “하나의 아메리카”를 외치며 그 길을 간다.
그래서 중도는 부산역도 안을 수 있고, 서울역도 안을 수 있다.
때로는 좌파를 안고, 때로는 우파를 안는다.
좌파냐, 우파냐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인가를 따지기 때문이다.
중도의 가슴은 그렇게 넓다. 그게 포용력이다. 그게 경쟁력이다.
좌와 우의 중간이 중도가 아니라, 중도 안에 좌와 우가 있는 거다. 그게 진정한 중도다.
중도의 가슴을 품은 진보, 중도의 가슴을 품은 보수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중앙포토]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빠르다. 시대는 매 순간 변한다.
우리는 그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좌파니, 우파니 하며 ‘고정된 잣대’만 고집한다면
세상의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질 못한다.
세상과 맞물려 호흡하지 못하면 결국 박제가 되고 만다.
그게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국가든, 이념이든, 종교든 마찬가지다.
따져 보면 중도의 뿌리는 종교다.
부처도 일찍이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중도’를 강조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나는 알파(시작)요, 오메가(끝)다”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다”
이 모두가 중도의 메시지다.
그럼 예수와 부처는 왜 중도의 메시지를 던졌을까.
답은 간단하다.
중도의 가슴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가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중도를 모르면 어찌 될까.
“내 것만 옳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그마가 되기 십상이다.
스스로 이념의 박제가 되고 만다.
그 와중에 생겨나는 온갖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아군과 적군, 세상을 둘로 쪼개면서 말이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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