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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되살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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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4-04-06 08:46 View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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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2024 MAGAZINE



릴레이 인터뷰

이승만을 되살린 사람들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다음 세대에게 이승만을 부탁합니다”(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 “모든 세대가 이승만을 잊고 있었어요”(신동설 청미디어 대표)

⊙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의 원래 이름은 ‘현대 한국학 연구소’… 

그 이름 내걸기도 꺼렸으니”(류석춘 前 연세대 교수)

⊙ “젊은이들에게 이승만 알아달라고만 할 게 아니라, 그럴 만한 환경을 조성해줘야”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 “마지막으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그녀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알리고 싶어”(복거일 작가)

⊙ “유신·운동권 이후 태어난 요즘 세대, 지금의 대한민국 출발점에 의문 가질 것”(이한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 사진=조선DB


“부정선거 다시 하라!”

‘탕탕탕탕’ 총소리가 연발했다. 

1960년4월19일 경무대 앞. 

참혹한 현장에 서울대 문리학부 신입생이었던 인보길(印輔吉·84)이 있었다. 

그날 눈앞에서 동기생을 잃었다. 

배를 헤집어놓은 세 발의 총알처럼 증오가 뇌리에 박혔다.

 

“그냥 (사람에게) 대고 쐈으니까… 참 잔인하지.”

둥굴레차를 손수 내온 그가 마주 앉더니 생각에 잠겼다. 

지난 3월1일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을 서울 중구 소월로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공휴일이라서 불이 꺼진 회사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선지 벽에 걸린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이상했다. 젊었을 적 그에게 이승만은 ‘학살자’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20년 인보길 회장은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이라는 책을 냈다. 

2010년부터 14년째 매달 ‘이승만 포럼’을 연다. 

경무대 앞에서 함께 플래카드를 들었던 류근일(柳根一·86) 전 《조선일보》 주필은 

지난해 이승만 대통령 묘소에 참배했다. 

오늘날 살아남은 이들 중 이승만을 가장 잘 아는 세대가 이승만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누적관객수가 110만명을 돌파했다. 

이승만 재조명의 신호탄인 셈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극우’ 내지 ‘친일’이라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이승만을 연구하고 알려온 이들이 있다. 

인보길 회장, 신동설 도서출판 청미디어 대표, 김광숙 도서출판 백년동안 대표, 복거일 작가,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류석춘 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한우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등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날, 이승만 물러나라고 외치지 않았어”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사진=월간조선


인보길 회장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4·19 세대다.

“서울대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을 때였어요. 

3학년 선배들이 주모자였고. 

선배들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나와라’ ‘나와라’ 하더니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했지. 

그때 외친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였어. ‘이승만 물러나라’가 아니었다는 말이야.”

 

 ― 그때 기억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여하튼 그렇게 나갔는데, 

뭐 대학로 나가자마자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종로4가에 있던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또 한번 두들겨 맞고…. 

그리로 해서 국회의사당,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로 쓰고 있는 그 건물이 예전에 국회의사당이었거든. 

그 앞에서 연좌농성하다가 쫓겨나서 예전에 조선총독부 건물까지 갔죠. 

그 앞에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모여 노래 부르고 도시락 까먹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는 거야. 점심시간 막 지나고 1시쯤 됐을까, 경무대 앞에서 발포한 거지. 

거기까지 갔던 친구들이 막 쫓겨 오는데 그 자리에서만 몇십명이 죽었어요.”

 

― 그럼 이승만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언제인가요.

 

“1995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었을 때, 

안병훈 편집인(현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이 

해방 50주년 행사로 ‘이승만 나라 세우기’ 전시회를 큰 규모로 열었어요. 

이승만의 논설 등 독립운동 기록들을 읽고 각성했죠. 

수십년간 분노, 기피의 대상이었던 이승만이 ‘연구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거죠.”

인보길 회장은 4·19세대가 전향한 기점도 이때라고 설명했다.

 

― 과거엔 이승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요.

 

“만으로 열살 때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라고 배웠죠.”

 

“김일성 장군 만세!”

인보길 회장이 국민학교 4학년 때 6·25가 터졌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백묵을 들어 흑판(黑板)에 무언가를 적었다. 

반장이었던 인보길이 일어나 ‘차렷, 경례’를 말하려는 순간, 담임은 인보길을 불러 세웠다. 

그러곤 칠판에 적힌 문장을 크게 외치라고 시켰다. 

1학년 때부터 쭉 그 담임 밑에서 반장을 맡았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소리쳤다.

 

“김일성 장군 만세!”

친구들도 일제히 따라 외쳤다. 담임이 또 다른 문장을 적고는 읽으라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곧 붉은색 스카프를 두른 소년단이 조직됐다. 

담임은 반장 인보길에게 단장(團長) 감투를 줬다. 

그렇게 시키는 대로 ‘남조선 해방 축하 예술제’를 준비했다. 

연극과 합창 등이 이뤄지던 날, 인보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개막 웅변’이었다. 

담임이 써준 원고를 달달 외웠다. 

아직도 기억나는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미(美)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괴뢰도당을 태평양 물속에 장사 지냅시다!”

 

동시에 탁자를 ‘탁’ 내려치니 관중의 박수가 쏟아졌다. 

신이 났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칭찬했다. 우쭐했다. 

그때 기분을 “인기 배우가 된 느낌”이라고 생생히 기억한다.

 

인민군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둥근 탄창이 달린 따발총(소련제 기관단총)을 어머니의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그렇게 석달이 지났다. 

그의 고향 당진이 점령당한 기간 동안 인보길의 가족은 쥐 죽은 듯 지내야 했다. 

아버지가 마을 이장이었고 외삼촌이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밤마다 인민군들이 급습해 “그 반동새끼들 어디다 감췄냐”며 총구를 겨눴다. 

아버지가 ‘인민재판’을 받는 모습도 목격했다.

 

“인민군들이 제 아버지를 ‘반동 지주 새끼’라고 하며 밤마다 인민재판에 끌고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공산당회의도 아버지가 주재(主宰)하고 기록했지. 

낮에는 공산당 회의를 진행·기록하고, 밤엔 끌려가서 재판을 받는 죄인이 된 건데. 이상한 1인2역이죠(웃음).”

 

3개월이 흐르고 어느 날 밤, 담임은 인보길을 불러냈다. 

그러곤 그간 준비했던 공산당 웅변, 연극, 대본, 노래 가사집(歌詞集) 등을 급우들에게 걷어 불태우라고 했다. 

이후 담임은 홀연히 사라졌다.

“이 얘기를 왜 꺼냈냐 하면, 10대 때 보고 듣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야.”

 

좌편향 수업에 항의했다가 벌 선 중학생

지난 2월 인보길 회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앳된 남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 회장이 “여기 뉴데일리인데요”라고 하자 김형균(16)군은 “아, 인보길씨 알아요”라고 대답했다. 

지난 2월20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김군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이승만은 하와이 갱스터(폭력배)였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영상을 틀어줬는데, 

제가 ‘이승만은 민주주의자였다’고 반박하니 손들고 복도로 나가라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승만 관련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엔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여성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투표권을 부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이분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구나 싶어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선 세번 울었어요.”

 

인보길 회장은 김군에게 〈건국전쟁〉 관람후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를 뉴데일리에 가감 없이 실었다.

 

“이 학생이 쓴 글이 중학생 솜씨 같지가 않아요. 

이승만에 관한 책을 스스로 찾아서 10권도 더 읽었다는데 지식이 아주 탄탄했어요. 

10대 때의 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효과도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 거죠.”

 

김군이 읽은 책 중엔 인보길 회장이 쓴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도 있다. 

이승만을 연구해온 다른 이들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군의 사례처럼 교육현장에서의 좌편향 문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사가 이승만 얘기했다고 “수준 미달”

 


신동설 청미디어 대표가 자신이 펴낸 이승만 관련 책들을 끌어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한겨레》는 2014년6월10일 

〈중학교 통일안보 강사가 ‘이승만 미화’, 항의 학부모엔 “종북세력 있나” 막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의 첫 문장이다.

 

“교육부가 전국 시·도교육청에 ‘국가보훈처 등을 활용한 통일안보 교육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가운데, 

일선 교육현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수준 미달’의 강의가 행해지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이다.

“교내 텔레비전 방송강연에 나선 이는 출판사 대표인 신아무개(67)씨였다. 

신씨는 오전 3교시 45분간 진행된 강연에서 주제인 ‘통일’과 ‘안보’ 대신 이승만 전 대통령 얘기에만 집중했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된 ‘문제의 출판사 대표는’ 도서출판 청미디어의 신동설(77) 대표다. 

청미디어는 《풀어쓴 독립정신》, 유영익(1923~2023년) 전 고려대 교수의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등 

이승만과 6·25에 관한 권위있는 책들을 펴냈다.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대통령 이승만〉을 3부작에 걸쳐 책으로 펴낸 것도 

신동설 대표다. 

경기 하남에 있는 신동설 대표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신 대표는 정말 ‘수준 미달의 강의’를 했을까. 

무슨 내용으로 강의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통일 교육 시간이잖아요. 

6·25가 남침(南侵)이라는 걸 먼저 설명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남북간의 사소한 충돌이 번진 거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것부터 바로잡았어요. 

100마디 말보다 한장의 사진을 보여줬죠. 

그게 뭐였냐면 6·25가 터지기 전에 국군이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모습이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시찰을 간 모습도 나왔죠. 

그 사진을 보면 거기에 총이 하나도 없어요.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중학생들에게 물었죠. 

총 한자루 없이 훈련시키는 나라가 먼저 쳐들어갈 수 있겠냐고요. 

말로 하는 것보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여주니까 학생들도 믿기 시작했어요.”

 

― 학생들 반응이 어땠나요.

 

“중학생들은 보통 이런 강의를 15분만 들어도 몸을 비틀고 지겨워한대요. 

그런데 제 수업은 45분 동안 집중해서 듣더라고요.”

 

신동설 대표의 강의 자료를 살펴봤다. 

50페이지 분량의 파워포인트(PPT)였다. 

글은 거의 없고 대부분 사진이었다. 

이승만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과 하야성명 등 음성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자료엔 이승만의 공(功)과 과(過)가 담겨 있었다. 

공으로는 

▲차선책으로 남한 정부 수립 

▲북한의 남침 분쇄 및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인민 봉기를 막은 농지개혁 

▲교육 혁명 등이 있었다. 

과는 

▲장기집권 

▲친일파 처리 

▲언론 탄압 등이 기재돼 있었다.

 

이런 그도 이승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예순을 넘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승만을 싫어하는 일본도 그의 책을 번역하는데…” 

― 젊었을 적 이승만에 대한 인식은 어땠나요.

 

“형편없었지. 부정선거 했고 독재자였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 언제까지 그랬습니까.

 

“예순이 다 될 때까지 이승만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이 고착화돼 있었어요.”

 

― 그럼 어쩌다 생각이 바뀌었나요.

 

“평생 출판을 하다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1941년에 쓴 책 《Japan Inside Out》을 접하게 됐어요. 

여러 책을 통해 이승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글을 보다 보니, 여러 글이 쭈욱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책은 

제가 직접 관련 있는 사진들을 집어넣고 편집을 하며 하나하나 자료들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신동설 대표가 이승만에게 각별해진 계기엔 ‘출판업에 대한 자부심’도 한몫했다.

“사실 《재팬 인사이드 아웃》은 

2005년, 경무대 취재 경험이 있는 어느 노(老)기자로부터 번역을 부탁받은 거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1941년 영어로 출간된 게 아니라, 1956년에 일본 무역신문사가 번역해서 발행한 거였어요. 

충격받았어요.”

 

― 왜요?

 

“당시엔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을 설정해 해양주권을 선포하고 

이 해역을 넘어오는 일본어선들을 나포하는 등 한일관계가 극도로 나빴거든요. 

우리도 출판 대국으로 올라서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미 싫어하는 상대의 책도 번역할 만큼 문화의식이 높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저도 얼마나 팔리든 신경 쓰지 않고 출판인으로서의 방향을 다잡기로 다짐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것도 전부 펴내고 있어요. 

수지타산 생각했으면 이렇게 안 했죠. 

이런 책들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것이 출판인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 책을 번역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2년 가까이 했죠.”

 

― 많이 팔렸나요.

 

“안 팔려요. 이승만 대통령은 출간 당시인 2007년에 이미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존재였으니까요. 

모든 세대가 이승만을 잊고 있었어요.”

 

― 다른 책들도 소개하자면요.

 

“이승만 대통령이 1904년에 저술한 《독립정신》을 2008년에 책으로 냈어요. 

이런 소중한 책들이 있는데도 이승만 대통령 관련 단체에서조차 (출판할) 생각을 못 했던 거예요.”

 

“이승만 알리는 데 작은 역할 했다면 족하다”

출판업 종사자답게 신 대표는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강조했다.

―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교육이라고 봐야죠.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문맹률이 86%였어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 빠듯한 나라 살림에도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시행했어요. 

1959년엔 취학률이 95%에 달했어요.”

 

신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책을 읽는 이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저희 책은 독자들의 연령대가 있는 편이에요. 이분들은 책을 사 보고 혼자 ‘끄떡끄떡’ 하고 말아요(웃음).”

 

― 영화 〈건국전쟁〉이 인기인데, 책은 그만큼 인기를 끌지 못해서 아쉽진 않았나요.

 

“아니요. 아쉽지는 않아요. 

잊힌 이승만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데 조금이나마 제가 힘이 되었다면 그걸로 제 사명은 다했다고 봅니다. 

《일본, 그 가면의 실체》의 초판을 낸 게 2007년이에요. 

이후 이승만에 관한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제 이승만을 알리는 첫 알람음이 울렸죠. 만족스럽습니다.”

 

도서출판 백년동안 김광숙 대표의 ‘젊었을 적 이승만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이승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어요. 그저 ‘독재자 영감’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학교에선 이승만을 악마로 묘사했고, 저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는 “하루라도 빨리 역사교과서를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광숙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을 알리기 위해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교육혁명》 외 31권에 달하는 ‘대한민국 총서’를 펴냈다. 

단행본으로는 《이승만 깨기》를 펴냈다. 

복거일 작가의 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도 출간했다.

 

“죽을 죄 짓는 것도 아닌데…”

 


류석춘 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진=조선DB

  

교육계에서 이승만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는 류석춘(柳錫春·69) 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증언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활동했던 그의 얘기다.

“지금 연세대에 있는 ‘이승만 연구원’은 원래 ‘현대한국학 연구소’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총장에게 말했어요. 

이승만을 알리기 위해 만든 연구소 이름에 왜 ‘이승만’이라는 글자를 못 붙이냐고요. 

죽을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사료를 연구하고 공부하는데 숨어서 할 일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고요. 

결국 총장도 제 이야기를 듣더니 수긍해서 이승만 연구원이라는 간판을 달 수 있었어요.”

 

―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꺼렸다는 건가요.

 

“좌파정부, 우파정부가 번갈아가며 있었잖아요. 

우파인 학자들 중에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공개적으로 이렇게 (이승만을 연구하는) 활동을 하면 

괜히 나중에 미운털 박혀서 불편하다’며 

공개적으로 나서는 활동은 피한 학자들도 일부 있었어요. 애환이 많았습니다, 원장 하면서.”

 

― 젊었을 땐 이승만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까.

 

“젊었을 때는 저도 잘 몰랐어요. 

다만 좌익세력이 대한민국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어요. 

그들의 이야기대로면, 우리의 현대사는 엉망진창이고 이 나라는 이렇게 발전할 수가 없는데 

지금 이렇게 성장했잖아요.”


― 이승만의 과(過)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1950년대 말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연로했죠. 

직접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거나 지시하진 않았지만 

2인자인 이기붕이 내무부 장관 등과 공모하는 동안 

총책임자가 확인하지 못한 건 최고 지도자로서 좀 잘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류 전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33년간 영어로 쓴 일기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공동저술을 포함해 이승만 관련 저서만 40~50권을 썼다. 

영화 〈건국전쟁〉에도 출연했다.

 

류 전 교수는 연세대 재직 시절 학생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다. 대학에서 주로 발전사회학 수업을 맡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지난 70~80년 동안 수직 상승한 성공을 거둔 나라인데, 

그걸 설명하는 이론과 frame(뼈대)이 있어야 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처음엔 “저 꼴통이 또 뭔 되도 않는 소리 하는구나”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기가 끝날 무렵 대부분의 학생은 ‘그거 말이 된다, 유익한 수업이었다’고 했다. 

수업은 인기를 끌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전공수업의 수강인원이 보통 20~30명인데, 류 전 교수의 수업엔 50여명이 몰렸다고 한다.

 

“여유 생긴 젊은 세대가 이승만 재조명할 것”

이한우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은 

1995년 조선일보사 주최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시회의 실무를 총괄했었다.

이처럼 이승만에 대한 젊은 층의 인식변화에 대해 

이한우(李翰雨·63)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도 비슷하게 분석했다.

“젊은 세대는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제가 1995년 《조선일보》에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할 때만 해도 반응이 달랐는데, 

그때 30~40대는 운동권 세대였으니까. 

저는 여유가 생긴 덕분이라고 봐요. 정신적으로 우리 역사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거죠. 

그 전까지는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한다고 해서 앞만 보고 내달렸잖아요. 

그러다가 지금 세대는 생각하게 된 거죠. 

대한민국이 누군가의 리더십 없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겠냐는 것을요. 

근대화의 뿌리에 이승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사진=조선DB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마냥 이승만에 대해 알아달라고 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기 전에 그럴 만한 환경을 조성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걸 안 해놓고 관심 가져달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 그러기 위한 노력을 한 적이 있나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김영림씨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일본어로 번역하라고 했어요. 

번역은 잘 이뤄졌고 지금은 그 책이 일본의 모든 대학과 국공립 도서관에 비치됐다고 해요. 

그리고 1년에 한번씩 대학생들을 선발해 이승만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는 사업을 했어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하와이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지원했던 학생들도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프란체스카 여사를 더 존경”


 

복거일 작가. 사진=조선DB

  

4·19세대의 막내 격인 복거일(卜鉅一·78) 작가는 

이승만을 향한 대부분의 비난이 ‘기억의 재편집’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복 작가는 4·19혁명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지난해 암 투병을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광복, 건국을 다룬 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냈다. 

그는 4·19를 이렇게 기억한다.

 

“중요한 건, 당시에 우린 이승만 대통령을 증오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건 훗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때 기억나는 구호 중에 ‘이승만 하야’는 없었어요. 

노래 부르고, 행진하고, 부정선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집에 찾아가는 식이었어요.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국민감정도 좋았어요. 

그런데 역사를 편향되게 바라보는 이들이 왜곡을 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이 재편집됐어요. 

그래서 그때 나오지도 않은 구호들이 소문처럼 나도는 거예요.”

 

복거일 작가는 이승만 못지않게, Francesca Donner Rhee(1900~1992년) 여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드러냈다.

“사실 저는 이승만 대통령보다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더 커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엄밀히 말하면 한민족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남편의 조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남(雩南·이승만의 아호) 묘지에 가서 성묘하는 게 

그분의 일과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서양 남자가 찾아와 자기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며 같은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니 

‘저는 한국 사람’이라며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고 해요.”

 

이 일화에 감동받은 복거일 작가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제목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 


그의 말이다.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말기암이라서 큰 계획은 못 세워요. 한해 한해 그냥 살아갑니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프란체스카 여사 뮤지컬을 영어로 만들어서 전 세계에 뿌리고 싶어요. 

요즘엔 넷플릭스 같은 좋은 수단이 있으니까. 

특히,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우아한 나라예요. 

그런 곳에서 와서 거의 쓰러져 가는 타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지고(至高)한 뜻이 있는 겁니다. 

남편을 사랑한 걸 넘어, 그의 이상(理想)을 함께 받아들인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복거일 작가처럼 이승만과 가장 가까운 세대는 이제 연로(年老)하다.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주영(82) 전 건국대 부총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뜻은 고마우나 건강상태가 좋지를 못해 응하지 못함을 용서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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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모든 동물의 생존본능은
그 생활환경에 따라 영양분 섭취 최대화와 위험성 최소화로 진화됐다
즉, 먹거리가 있는 곳에 모이고, 모이면 개별적인 위험성은 분산된다
그것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학습과 경험에 의한 인지능력 향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성과 노력에 따라 개인각자의 성취를 향하는 것이며
공산사회주의는 이득을 재분배함으로 상대적  빈곤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즉, 전자는 자연의 법칙과 본능에, 후자는 인위적인 설계에 따르는 것이다
조선조정과 왜정으로부터 해방과 독립과정에서 남북한은 길을 달리 헀다
무지와 빈곤으로부터의 탈피는 행복추구를 향한 문명의 시작이며 목표다
해방되고 독립한지 70몇여년, 아직도 그 무지와 선동을 구별 못하고 있다
생존은 반복되는 선택의 갈등이며 그 결과적 산물 또한 그 생명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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