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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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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5-06-20 03:07 View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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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명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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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Scythians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현대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서북부 일대 스텝지역에서 존속했던 이란계 유목민족.


스키타이족이 쓰던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군에 속했다. 

오세트어가 이 언어의 후손 중 하나다.


한국고고학사전의 스키타이 설명

2. 명칭과 분화[편집]

페르시아어 '사카'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인들을 부르는 용어였고, 

중국어 '사이(중국어: 塞)'는 

한 때 일리강과 추강의 계곡에 거주했다가 타림분지로 이주한 사카인들에게 사용하는 용어였다.[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이 스스로를 스콜로트, 혹은 소클로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세메레니 오스벌드는 스키타이인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을 연구했고 다음의 결과를 제시했다: 

Skuthes Σκύθης, Skudra, Sug(u)da, Saka.[8]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다양한 명칭들에는 2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1) "나아가다", "쏘다"[9]를 뜻하는 인도유럽어 어근 *(s)kewd-에서 유래했다. 

*skud-는 동일 어근의 제로 그래이드[10] 형태이다. 

세메레니는 스키타이인들이 스스로를 '*skuda'[11]라고 불렀다고 추정했다.[12]


2) 고대 페르시아어,[13] 그리스어 Σάκαι; 라틴어 Sacae, 산스크리트어 शक 와 같은 형태들은 

"이동하다", "돌아다니다"를 뜻하는 이란어 동사 어근 sak-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유목민"을 뜻한다.


고대 작가들은 다뉴브강과 돈강 사이의 스텝지역, 

그러니까 흑해 북안에 살았던 유목민들을 한데 묶어 '스키타이'라고 불렀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의 지리학자들은 

'철기시대에 유라시아 대초원 지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기마유목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스키타이를 사용했으며, 

이들의 특징을 독특한 무기와 마구, 그리고 동물들을 표현한 예술품 등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키타이는 점차 카스피해의 북쪽에 거주한 사르마티아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이전의 유목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의미가 축소되기 시작한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스키타이'라는 용어를 두고 

이전의 정의들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개체군들을 한데 모아서 

철기시대의 유라시아 대초원 지대에 있었던 다양한 기마유목문화들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하여 

기원전 7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흑해북안에 거주했던 유목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정형화되었다.


현대 인류학자들은 대신 '스키토-시베리아인(Scytho-Siberian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유라시아 대초원과 중앙유럽에서 북중국의 한계선까지 이어지는 

삼림~초원 지대에 거주했던 유목민들의 공통된 문화적 집단으로서 간주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도 비판이 적지 않은데, 

특히 니콜라 디 코스모나 안드레이 로즈와도프스키는 '스키토-시베리아인' 대신 

'초기 유목민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3. 기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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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러시아 남부, 캅카스 동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역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 스스로는 스콜로트라고 불렀으며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부른 말로 고대 그리스어로 '궁수'(Skuthēs)에서 유래했다. 

페르시아에선 Sakā라고 불렀는데 뜻은 동일했다.[18] 

스키타이와 국경을 마주하던 아시리아에선 '유목민'이란 의미의 Askuzai라고 불렀다.


본디 이들은 그저 이란계 유목민족이었지만 

기원전 11세기쯤 유입된 이민족들과 섞이면서 '스키타이'라는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채리엇이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며 싸웠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원전 9세기 즈음에 킴메르족이라 불리는 다른 유목민족이 있었는데, 

스키타이인들과 경쟁을 반복하던 중 스키타이의 기술이 좋아지고 수가 많아지자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킴메르인들을 캅카스 지역 너머로 몰아내고, 

텅 빈 캅카스와 카르파티아 산맥도 넘으며 동서남북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시켰다.[19] 

그러나 그 이후로 세력이 점점 줄어들더니 

기원전 4세기에는 서방에서 몰려온 이민족들에게 서방영토 일부를 빼앗기고, 

결국 같은 어족에 속한 켈트족과 게르만족, 게타이족의 압박으로 서방의 영토를 영구히 상실했다.


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동쪽에 있었던 스키타이 또는 샤카들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동쪽에서 흉노와 오손, 월지가 공격하여 남쪽인 그리스-박트리아와 파르티아로 옮겨가 두 국가를 침략했다. 

한편 파르티아는 스키타이인들을 방어했으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했다. 

스키타이들은 인도 북부에 있었던 인도-그리스 왕국도 쳐들어가 인도-스키타이 왕국이 되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파르티아의 세력 일부분에게 멸망해  자리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으로 대체되었고, 

그들이 페르시아화되었는지 멸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라지게 되었다.


서쪽에 있었던 스키타이인들은 

크림반도와 그 근역에서 살아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세력이 약해지면서 

분파 혹은 친척인 사르마티아인과 알란인에게 흡수되었다. 

그 후손이 오세트인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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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게아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과 전투를 벌인 기록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흑해지역으로 원정해 현 우크라이나 남부에 살고 있었던 스키타이족을 정벌했다. 

세월이 지나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스키타이인들이 복수를 위해 마케도니아를 침략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기원전 329년 악사르테스 전투를 벌여 이들 스키타이인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는 굳이 동쪽의 스키타이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는 않았고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래서 스키타이인들은 자기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물리쳤다고 주장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3.1. 한민족과의 관계

'바지·저고리차림' 한복 원류는 스키타이 문화


학계에 따르면 한복의 원류는 중국이 아니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동한 유목민족 스키타이(사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복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와 같은 二部式(투피스) 차림새가 

이때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옷은 스키타이계 문화권에 속한다"며 

"스키타이는 말을 타는 유목민족으로 

오늘날 승마복처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간편한 차림새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식문화사》를 저술한 김문자 수원대 의류학과 교수도 

<고대 한복의 원류 및 세계화 속의 한복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우리 한복의 바지, 저고리차림의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족의 대표적인 복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들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기마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기본"이라며 

"이는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피혁으로 바지통이 좁게 만든 '세고'[21] 양식이 대표적인 예인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 등에서 발견된다. 

반면, 당시 중국 漢族은 겉에서는 바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길이의 겉옷을 착용했으며, 

옷을 여미는 부분도 매우 길어 등 뒤로 돌아갈 정도였다.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노자를 그린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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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서 검사해서 나온 DNA분석


2009년에 제작된 KBS의 <역사스페셜> - "신라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편에서 

제작진이 아시아 지역 고인골 샘플 2천여개를 보유 중인 중앙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신라인과 흉노의 유전적 근원성에 관한 DNA분석을 의뢰했는데, 

스키타이인과 신라인의 유전자가 흡사하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신라인과 흉노의 DNA 일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뜻밖에도 모계 DNA와 부계 DNA 둘 다 흉노보다는 스키타이와 흡사하게 나왔다. 

해당 영상에서 중앙대 이광호 교수는 자신도 뜻밖의 결과라 여러 번 반복검증했지만 

신라인과 스키타이인의 유전자가 유사하게 나온다는 인터뷰를 한다. (36분16초)


현대 한국인의 조상은 알타이 산맥에서 대이동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연구가 있다. 

고조선도 '흉노의 왼팔'로 불리었던 기록이 있고,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도 북이(北夷)의 탁리국에서 도망쳐온 흉노이며, 

부여에서 나왔다는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역시 고조선 유민들이 사로 6촌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고조선계 문화였음이 확인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편에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와 풍습이 같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을 죽으면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100명이나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순장 풍습 또한 흉노의 풍습이다. 

이런 만주의 초기 한민족 문화는 북방 유목민 문화의 동쪽 끝자락에 닿아 있었고 

최소한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고 받았거나 아예 그러한 유목민 문화의 일파로 여겨진다. 

이때 그 '초기 북방유목민 문화'가 바로 문헌상 나타나는 제일 오래된 유목민 문화인 스키타이로 비정된다.


신라의 무덤 양식이라든가 신라의 금관, 황금 보검 등은 실제로 굉장히 유사하다. 

특히 신라 금관에서 나타나는 장식들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에서 나타나는 사슴, 나무,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고구려를 위시한 고대 한복의 모태가 스키타이였다는 것이 한국 복식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흉노족 신라왕족설 등 신라를 흉노족과 연관 짓는 설이 있으나, 

유목문화와의 연관성은 

신라 이전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부여에서 파생된 국가(고구려,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신라 문화가 흉노와의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신라가 흉노에서 파생되었기보다는 

흉노와 신라가 같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파생된 흔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44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환도성과 국내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245년 재침한 관구검은 동천왕을 북옥저까지 밀어냈지만 

밀우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위군을 막아서고 

유유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에게 자살공격을 감행하면서 관구검군은 남서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북서 신라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留者遂爲新羅亦曰斯盧

혹은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하여 파하고 옥저로 도망하여 그 후에 옛 나라로 돌아왔는데 

남아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이루었다.


당시 위(삼국시대)군은 오환 선우 구루돈과 연합군을 결성하였는데 

위군과 동행한 오환군의 행방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3세기 후반 낙동강 일대에 오환 계통의 마구류, 철제갑주, 청동솥이 출토되며 

무덤 양식도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때 방치된 오환군이 귀국하지 못하고 사로국 일대로 망명했을 수도 있다는 것.


또 342년11월 전연[22]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쳐들어가자 

고국원왕은 수도와 가족을 버리고 파천했고, 

모용황은 환도성에서 고국원왕의 모후와 왕후를 사로잡았다. 

이때 장군 왕우에게 1만5천명의 병력을 주고 따로 움직이게 했는데 

왕우가 이끌던 병력들이 고구려에게 전멸당했다는 말을 듣자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대판 약탈한 뒤에 환도성을 불태우고 귀국하였다. 

해당 기록을 보면 

모용황은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한 왕우 휘하 1만5천명에 대해 신경 끄고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일부가 살아남아 신라로 망명했고, 

강세는 이때 망명한 부대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이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오환족과 선비족은 동계고, 선비족은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의 후예로 전해지지만 

흉노의 일파는 선비족과 오환족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며, 

선비족과 오환족 모두 단일부족이 아니라 내몽골~서만주 일대 여러 유목부족 집단의 느슨한 연합체제였다. 

고고학계에서 흉노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흉노는 지배층은 동북아시아계 유전자로 단일화되어 있었지만 

피지배층은 여러 유전집단들이 뒤섞여 있었다. 

흉노의 피지배층은 동아시아인/시베리아인과 스키타이 및 사르마티아인,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파나시예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파지릭 문화 등의 

유라시아 대초원에 살던 고대인의 후예로 이루어진 유목부족들이 각자 따로 존재했다가 

2,200~2,000년 전 갑자기 모종의 이유로 급속도록 혼혈되었고 

이는 흉노제국의 성립 시기와 일치한다. 

흉노의 피지배층은 대체로 유라시안이었고 

각 부족들은 유전형질에 따라 동북아시아계가 강하기도 했고, 백인계의 성질이 강하기도 했다.[23]


고고학적으로 

신라 김씨 족단의 기원은 충주 금릉동 일대의 마한 소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세기 중반 서북한 고조선계 세력 일부가 충주 금릉동 일대로 남하하여 

친목지국(천안 동남구 청당동 일대) 성향의 마한 소국을 세우게 된다. 

사서에서 국호가 기록되지 못한 정체불명의 소국은 동시기 임진강에서 한강이남으로 남하해 

한성백제를 세운 백제에게 3세기 후반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고, 

목지국 본가를 비롯한 충청남도 일대가 백제에게 정복당했지만 

금릉동 ??국을 비롯한 충청북도 소국들은 목지국의 편을 들었고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진한 소국들의 지원을 받아 

4세기 초반까지 백제에게 저항하다 결국 백제에게 집단 전체가 소멸당하게 되자 

사로국에 망명하여 신라 김씨 족단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4세기 중반부터 미추 이사금-내물 마립간과 같은 김씨 왕이 

동시대 박씨·석씨 왕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24]


신라의 씨족 관념은 동시대 중국, 고구려, 백제와 달리 고대 일본에 가까웠기 때문에 

다양한 유래를 가진 혈족 여럿이 모여서 하나의 새로운 족단을 창설하는 경우도 가능했다.[25][26] 

신라 김씨 왕조가 뜬금없이 부계와 모계 모두 스키타이계 DNA가 나타나는 건 

구도계 김씨가 사로국에서 세력을 형성하던 당시 

모종의 이유로 신라까지 남하한 스키타이인 유전자를 가진 오환족, 선비족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고조선과 흉노가 긴밀한 관계였다는 사서의 기록을 고려하면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 스키타이인 유전자를 가진 흉노의 일파가 고조선에 동화되어 

김씨 왕조의 조상인 서북한 고조선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 김씨 왕조는 장신이 많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 지배층의 신장을 확인해본 결과 170cm가 넘거나 180cm에 달할 정도의 장신들이 많아서 

사실로 추정되기 때문에 북방계 유전자로 인해 김씨 왕조의 신장이 유독 컸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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