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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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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4-01-17 13:06 View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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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점에 위치한 탓에 이집트 세력의 지배를 많이 받았다. 

고대 시기에 요새화된 도시는 

신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하스몬 왕조 등 북방세력의 공격에 맞서 

수차례 방어에 성공하였지만 결국은 점령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3.1. 고대 필리스티아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제1 왕조가 

현 시가지 남쪽 텔 엣 사칸에 성채를 건설하여 아시아 방면의 교도보로 활용하였다. 

그후 가나안 인들이 거주하였고, 힉소스의 침공 등으로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1450년경 신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현 가자 위치에 도시를 세웠고, 

이후 아마르나 서신에서 '아자티'로 지칭되었으며 

대상무역으로 번영한 끝에 가나안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총독부로 기능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12세기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신이집트가 쇠락한 후 

가자에는 바다 민족의 일파이자 팔레스타인 지명의 어원인 필리스티아인들이 정착하였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경쟁하던 필리스티아인들은 

가자 ~ 자파 해안에 걸쳐 5개의 도시, 즉 펜타폴리스 (가자, 아슈켈론, 아슈도드, 에크론, 가트)를 건설하였는데 

가자는 그 중 가장 큰 도시였다. 

성경 판관기 16장에서 가자는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붙잡혀 구금된 곳으로 등장한다.


다윗의 정복 후 약 3세기간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를 받은 가자는 

기원전 8세기 말엽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후자가 멸망할 무렵 이집트의 네코 2세가 재차 가자를 장악하였고, 

기원전 601년 근교 미그돌에서 남하해온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격파하였다. 

기원전 568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어코 가자를 정복하였으나 

신바빌로니아의 멸망 시에 재차 이집트가 회복한다. 

기원전 529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캄비세스 2세 역시 가자 점령에 실패하였으나 

3년 후 이집트 정복 시에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지배기에 가자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으며,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교역도시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520년경 그리스 인들이 가자에 상관을 세웠으며, 

기원전 380년에는 아타네를 모델로 한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시에 가자의 1만5천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였고, 

5개월간의 포위를 견딘 끝에 기원전 332년 가을 함락되었다.

(가자 공방전) 저항에 대가는 가혹하여 

지휘관 바티스를 포함한 시내의 성인 남성들은 모두 학살되었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려갔다.


3.2. 헬레니즘 도시

제우스 석상과 아폴로 청동상[4]

이렇게 가자 원주민들을 일소한 알렉산드로스는 현지 베두인들을 데려와 정착시켰고, 폴리스 지위를 주었다. 

디아도코이 시대에 들어 가자는 본래 안티고노스의 수중에 있었으나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이 

43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한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였다. 

그 후 가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이라크 기반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한 시리아 전쟁에서 가자는 대부분 전자의 소유였고, 

기원전 27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나바테아 원정 후 도시는 남부 아라비아와의 향료무역으로 번영하게 되었다. 

앞선 가자 전투에서 정확히 한세기 후인 기원전 217년 

현 이집트-가자 국경의 라파에서 벌어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안티오코스 3세는 동방원정 (아나바시스) 후 축적한 국력을 바탕으로 재침하여 

기원전 196년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톨레마이오스 조로부터 정복할 수 있었다.


2세기에 걸친 헬레니즘기에 가자는 그리스 문화가 자리잡았고, 

도시는 헬라 학문과 철학의 융성한 거점의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와 함께 가자는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야네이가 아크레를 침공하자 

키프로스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개입하였다. 

후자가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팔레스타인을 거점으로 다시 이집트를 노릴까 염려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 역시 

육상으로 북상하였다. 

프톨레마오이오스 9세는 그를 우회하여 가자에 이르러 월동하였으나, 

이집트 군대가 기수를 돌려 다가오자 기원전 102년 키프로스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한숨을 돌린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이듬해 이집트의 태후 클레오파트라 3세가 사망하자 정복을 재개, 라피아를 점령하며 가자를 고립시켰다. 

기원전 96년, 그는 가자를 공격하였다. 

현지 사령관 아폴로도토스는 야습으로 하스몬 군대를 격파하였고 수천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나바테아의 원조가 오지 않자 아폴로도토스의 형 리시마코스의 주도로 가자는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약속과 달리 공격적으로 돌변하였고, 

이에 민회와 5백여주민들은 아폴로 신전에 피신했으나 학살되었다.[5]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후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제국의 휘하에서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이자 이집트-시리아 간의 내륙 무역 도시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3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도시를 헤롯 대왕에게 넘겼는데, 

기원전 4년 그가 후자가 사망하자 다시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사도행전에서 가자는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사막로 상에 입지하였다고 거론되었다. 

서기 66년 유대 반란 시에 유대인 반군의 방화로 일부 파괴되었으나 곧 재건되었다. 

반란 진압을 맡은 티투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와 점령 후 회군할 때 모두 가자를 거쳐갔다.


2세기 로마제국의 나바테아 병합과 함께 가자는 전통적인 홍해 교역에 다시 나서며 번영하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500인 의회가 통치하였다. 

주민들은 필리스티아, 그리스, 로마, 가나안, 페니키아, 유대, 이집트, 페르시아, 베두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국제 도시였고 화폐 주조소가 자리하였다. 

130년 가자를 방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신설된 경기장에서 친히 각종 경기들을 주최하였다. 

그외에 로마 시기 가자에는 

토착신인 마르나스 및 티케를 중심으로 제우스, 헬리오스, 아프로디테, 아폴로, 아테나 등을 모시는 신전들이 있었다.


로마시대에 세워진 가자항구는 처음에 (나폴리의 어원이기도 한) 그리스식 지명 '네아폴리스'로 불렸고,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독립된 도시로 격상되며 '콘스탄테이아'로 개칭되었다가 

율리아누스 때에 '마이우마스'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간단히 마이우마로 불린 그 항구를 중심으로 가자 일대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여타 레반트의 도시들과 달리 내륙 가자는 다신교세가 강하였고 

299년에는 성경 강독을 위해 모인 기독교도들이 공격당하기도 하였다.


4세기 초엽 기독교 박해 시에 가자에선 성 실바누스와 30여 기독교도들이 순교하였다. 

(310년) 밀라노 칙령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해안의 마이우마와 달리 

내륙의 가자는 다신교 도시로 남았으며, 

이에 331년 콘스탄티누스는 두 도시를 분리하고 마이우마 주교좌를 설립한 것이다. 

다만 단일 총독이 통치하는 등 두 도시는 정치적으론 하나로 남았다. 

4세기 말엽 기독교의 국교화 후에도 기독교도의 공직취임을 불허하는 등 '이교' 도시였던 가자는 

402년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보낸 특사 키네기우스가 시내의 8대 신전들을 파괴한 후 

406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황후의 지시로 

마르나스 신전 터에 세례자 요한 성당이 건립되며 기독교화되기 시작하였다. 

6세기에는 성 세르기오스 성당과 시나고그 (유대 회당)이 세워졌으며, 

가자는 시나이 반도 순례의 출발점이 되었다.


3.3. 이슬람 시대

가자 대모스크[6]

팔레스티나 프리마의 남부해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가자에는 

7세기 들어 메카의 아랍상인들이 왕래가 잦아졌다. 

그 중엔 이후 칼리파로 즉위하는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도 있었고, 

무함마드 역시 젊은 시절 대상단의 일원으로써 한두차례 가자를 방문하였다. 

이미 630년경 가자에는 소수의 무슬림 개종자들이 있었으며, 

634년 레반트 정복에 나선 이슬람제국의 명장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일전의 아즈나딘 전투의 승리에도 굴하지 않은 가자 수비대가 

시내의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와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포위는 장기화되었고[7], 

야르무크 전투로 판세가 결정난 후인 637년 여름 가자는 3년의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 

아므르는 동로마 수비대를 학살하였지만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강한 저항에도 나타난 상대적 관용은 

이미 주민들 중 일정 부분이 아랍계였던 것과, 

가자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의 조부 하쉼 이븐 압두 마나프가 묻힌 곳이라 여겼던 것 때문이라 한다. 

다만 세례자 요한 성당은 대사원으로 개조되었고, 

애초에 기독교에 크게 감화되지 않았던 가자의 주민들은 쉽고 빠르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라쉬둔-우마이야-압바스 제국기에 가자는 필라스틴 군구 (준드 필라스틴)에 소속되었고 중소도시로 남았다.


672년 가자는 지진을 겪었고, 

723년 도시를 방문한 성 윌리왈도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지즈야를 내고 신앙과 상업 활동을 이어간다고 기록하였다. 

압바스 왕조기인 767년 가자에선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샤피이파를 세우게 될 대학자 무함마드 이븐 이드리스 앗 샤피가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내었다. 

796년 가자는 현지 아랍부족들 간의 내분으로 파괴를 겪었지만 곧 회복되었고 

9세기 페르시아인 지리학자 이스타크리는 

'이곳이 히자즈 인들에게 있어 훌륭한 시장이었기에' 상인들이 부유해졌다고 기록하였다. 

867년 익명의 기독교도 작가는 가자를 모든 것에 있어 풍족한 곳이라고 평하였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히자즈-시리아 대상 무역에 의한 것이었고, 

아랍인들의 도래 이후 지중해 무역은 쇠락하고 항구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그리고 9세기 말엽 압바스 중앙 정부의 약화 함께 현지 아랍/베두인들의 내분과 도적화로 

내륙 무역마저 불안정해지며 도시는 점진적인 쇠퇴에 들어갔다, 

한편 943년에는 인도로부터 오렌지가 전래되었다. 

977년 가자와 팔레스타인 일대는 쉬아 파티마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8년 후 가자에 당도한 아랍 지리가 알 무캇다시는 

'사막 끝자락 이집트로 향하는 가도 상에 놓인 큰 도시로, 아름다운 모스크가 있으며 

칼리파 우마르의 기념물 역시 볼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1049년 가자에선 아랍 시인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알 가지가 출생하였다.


3.4. 십자군 시대

1917년 영국군의 포격 후의 내부 고딕 건축

11세기 들어 안정을 회복한 가자는 곧 파티마 조의 쇠퇴와 함께 십자군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1099년 자파와 예루살렘을 점령한 1차 십자군은 1100년 하이파, 아르수프와 함께 가자를 점령하였다. 

12세기 중엽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유일하게 파티마령으로 남아있던 아슈켈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가자를 공격준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무렵 가자 대사원은 성 요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1149년 보두앵은 가자에 성채를 세우고 템플 기사단에게 하사하며 이집트 방면의 원군을 자단하게 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아슈켈론은 1153년 함락되었고, 

그후 가자 남쪽 다론에도 템플기사단 성채가 세워졌다. 

한편 1169년 이집트의 실권자로 등극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1170년12월, 다론을 포위하였다. 

이에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참십자가를 대동하고 구원에 나서며 

비서 밀레 드 플랑시에게 가자를 맡기고 다론으로 항하였는데, 

살라흐 앗 딘은 이를 우회하여 수비대가 거의 없던 가자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다만 시타델은 버텨내었고, 

보두앵이 회군해오자 살라흐 앗 딘은 네게스 사막을 건너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1177년, 이젠 이집트와 시리아를 망라하는 술탄에 오른 살라흐 앗 딘은 

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아슈켈론을 공격하였다. 

이때 각지의 분견대가 파견되었고, 가자 역시 포위에 놓였다. 

그러나 보두앵 4세와 르노 드 샤티용이 

원군을 이끌고 와 몽지스가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을 격파하며 무슬림 군대는 철수한다. 

10년 후인 1187년 여름, 하틴 전투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한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시돈-베이루트를 점령한 후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였다. 

9월4일 아슈켈론의 항복을 받아낸 살라흐 앗 딘은 

가자에 대해선 포로로 사로잡은 템플기사단장 제라르의 석방조건으로 가자수비대를 항복시키는 것을 제시하였다. 

제라르는 이를 이행한 후 석방되었고, 가자는 87년만에 이슬람령이 되었다. 

다만 1191년 3차 십자군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살라흐 앗 딘은 

야파, 아슈켈론, 카이사레아와 함께 가자의 성벽을 파괴하게 하였다. 

이듬해 5월 십자군의 리처드 1세는 

파괴되지 않고 수비대가 배치된 다론 성채를 함락한 후 가자를 재차 요새화하였다. 

다만 이듬해 휴전조약에 의거하여 가자의 성벽은 재차 파괴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로 확인되었다.


3.4.1. 이집트-시리아의 각축장[편집]

1239년11월, 귀족 십자군이 아슈켈론을 재차 요새화하자 

이집트의 술탄 알 아딜 2세는 가자에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알 하이자위를 파견해 수비를 맡겼다. 

알 하이자위가 고작 1천의 병력만을 지녔다는 소문에 혈기에 사로잡힌 일단의 십자군이 진군하였다. 

그들은 가자 외곽의 베이트 하눈에서 알 하이자위의 기습을 받아 괴멸되었다. 

그럼에도 아이유브 왕공들 간의 분쟁을 이용해 이듬해 십자군은 

다마스쿠스 아미르 이스마일로부터 나사렛-예루살렘 일대와 함께 가자 할양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8] 


한편 이 무렵 기존 도심 동쪽엔

 베이트 하눈에서 '순교'한 장군 슈자 앗 딘 우스만 알 쿠르디를 기리는 슈자이아 지구가 설립된다. 

이는 상업-주거 구역이었고, 허름한 저택과 좁은 비포장길들로 구성되었다. 

그 북쪽 알 주바이다 혹은 슈자이아 알 아크라드에는 모술 출신 쿠르드인, 

남쪽 앗 투르쿠만에는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치세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이 집단거주하였다. 

성밖에 입지한 슈자이아 (쉐하이야) 지구는 후에 크게 발전하여 가자에서 가장 번성한 구역이 되었다.


1241년5월 이집트의 술탄 아이유브 휘하 카말 앗 딘이 출정하여 가자를 수복하였고, 

이에 이스마일이 이집트 공격을 위해 가자로 진군하였으나, 

술탄의 본군과 마주한 무슬림 병사들이 이탈하며 원정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아이유브는 반격에 나서려 하였으나 이듬해 8월 카말 앗 딘이 가자에서 병사하며 무산되었다. 


1243년 이스마일은 재차 십자군과 가자로 진군했으나 곧 회군하였다. 

다만 가자는 다시 이스마일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1243년 이스마일과 시리아 영주들은 다마스쿠스, 가자에 군대를 집결하여 이집트를 침공하려 하였다. 

그때 아이유브가 불러들인 호라즘 인들이 시리아를 침공하자 원정은 다시 무산되었다. 


1244년 이스마일은 또다시 십자군과 함께 가자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아이유브는 호라즘 군단과 북상하였고, 

아슈켈론과 가자 사이에서 벌어진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 후 호라즘 인들은 가자에 당도하여 아이유브에게 이집트의 영지를 청하나, 

그들의 약탈을 우려한 아이유브가 거절하며 양측의 협력은 종결되었다. 

다만 이듬해 아이유브의 재상 무인 앗 딘이 출정하였을 때에 

그는 가자에서 일단의 호라즘 인들과 합류하였고, 함께 다마스쿠스를 포위해 점령하였다. 

그리고 1247년 아이유브 휘하의 파크르 앗 딘이 아슈켈론을 점령하며 가자에 대한 북방의 위협은 종식되었고, 

도시는 확고히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다만 아이유브가 이룩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250년 그의 사망과 함께 이집트에는 맘루크들이 득세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상호 경쟁에 나섰다.


1250년8월 유수프의 남하에 아이바크는 루큰 앗 딘 카스투르크 알 카비르 휘하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그들은 가자에서 유수프가 보낸 선발대와 마주하자 도주해버렸다. 

다만 유수프의 와병으로 그의 진군은 지연되었다. 

그러자 10월에는 파리스 앗 딘 휘하 2천 정예병이 출정하였고, 

가자에 배치된 유수프의 선발대를 기습해 격파하였다. 

패잔병의 행렬은 다마스쿠스에 닿았고, 파리스 앗 딘은 추격하지 않고 카이로로 개선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유수프는 재차 출정하여 12월28일 가자에 당도하였으나, 

이듬해 2월의 압바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 

기세를 얻은 아이바크는 루이 9세의 십자군과 연합해 시리아 공격에 나섰고, 

1252년 봄 양측의 합류를 위해 파리스 앗 딘의 1천 선발대가 가자로 파견되었다. 

이에 시리아군 역시 인근 텔 알 아줄에 파견되었으나, 양측 모두 십자군 앞에서의 충돌을 삼갔다. 

그리고 1253년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중재로 화의가 맺어졌고,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남부는 이집트령이 되었다. 

가자에서 회군한 유수프는 십자군 영토를 습격하며 분을 풀었다.


3.4.2. 정권 교체의 혼란

1254년 아이바크는 경쟁자 파리스 앗 딘을 제거하고 술탄에 오르며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이에 반발한 바흐리 맘루크들 중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700인은 가자에 당도하여 유수프에 복속을 청하였다. 

그러자 유수프는 직접 남하하고 가자에 환영단을 보내었으나, 바이바르스의 설득에도 이집트에 나서지 않았다. 

1257년 아이바크의 암살 시에도 유수프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실망한 바이바르스는 휘하 맘루크들과 다마스쿠스를 떠났고, 

예루살렘에 이어 가자를 약탈한 후 카라크의 우마르 휘하로 들어갔다.


그후에도 바이바르스는 가자를 종종 약탈하였고, 

분노한 유수프는 1258년 말엽 2,000 기병대를 파견해 바이바르스의 600 기병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9] 

그후 바이바르스는 가자와 나블루스 일대를 장악하였고, 

이에 유수프는 1259년 대군을 모아 그를 패배시킨 후 재차 복속시킨다. 

하지만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유수프는 다시 유약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실망한 나시리야 & 바흐리 맘루크는 바이바르스와 그를 암살하려 하나 실패하자 가자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일전에 유수프와 우마르 진영을 차례대로 이탈한 후, 

1년째 가자에 머물던 쿠르드계 샤라주리야 맘루크들과 합류하였다.


가자에 모인 맘루크들은 유수프의 동생 앗 자히르 가지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알레포 함락 소식을 들은 유수프는 

가자에서 맘루크 술탄 쿠투즈와 합류하자는 아미르들의 조언에 따라 다마스쿠스를 포기하고 남하하였다. 

폭풍과 도적단의 습격 등을 겪으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간 끝에 유수프는 2월 가자에 당도하였고, 

앗 자히르 가지는 사르카드 영지를 대가로 형과 화해하고 복속하였다. 

그러나 패잔병들로부터 이미 몽골군 선발대가 나블루스에 남겨둔 수비대를 격파했다는 비보를 접한 유수프는 

가자도 버리고 엘 아리쉬로 향하였다.

다만 맘루크들을 완전히 믿지 못한 유수프는 병력과 가족을 이집트로 보내고 자신은 알 카트야에 남았다. 

2월14일,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몽골사령관 키토부카는 가자로 분견대를 파견하였고 이듬달 자신 역시 남하하였다. 

가자로 돌아온 유수프는 다마스쿠스 시타델 병력의 반란을 유도하며 최후의 도박에 나섰지만 곧 다시 의지를 잃었고, 

바이바르스는 이집트 측으로 이탈한다. 

3-4월 몽골군 분견대가 가자를 약탈하자 

유수프는 네게브 사막을 건너 요단강 유역으로 향했다가 키토부카에 항복한다.


3.4.3. 대몽골 & 대십자군 거점

1260년5월부터 가자에는 바이다르 휘하의 몽골군이 주둔하였다. 

반격에 나선 바이바르스는 7월26일 몽골군을 축출하고 가자를 장악하였다. 

다만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곧 가우르 지방으로 향하였다. 

그후 대군과 가자에 당도한 쿠투즈는 잔여 호라즘 용병 등과 합류하였고, 

바이바르스와 함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때 활약한 맘루크 중 하나였던 아쿠쉬 알 바를리 알 아지지는 가자 일대 해안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러나 곧 술탄위에 오른 바이바르스의 숙청에 직면하자 

북상한 그는1261-62년에 알레포와 하란 등지에서 미래의 칼리파 알 하킴 1세를 옹립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한다. 

한편 1263년 다른 제후인 카라크의 우마르 역시 

훌라구로부터 보스라 ~ 가자의 영지 및 이집트 정복 지원 약속을 받은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후 가자는 바이바르스의 대십자군 원정 때에 거쳐가는 도시로 언급된다. 

1265년2월9일 카이사레아 점령과 1266년5월 사파드 점령 시에 지나갔다. 

후자의 경우 바이바르스는 가자에서 칼라운 휘하 7천 병력을 홈스로 파견하였고, 그들은 이후 트리폴리를 기습한다.


1279년엔 칼라운 본인이 바이바르스의 후계자들을 폐위하고 술탄이 되었다. 

이에 이듬해 다마스쿠스 총독 순쿠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산자르 알 할라비 휘하 정규군에게 가자에서 패배하였다. 

1281년 가을 몽골군이 재차 침공해오자 칼라운과 순쿠르는 화해하고 함께 2차 홈스전투에 임하였다. 

비록 초반 맘루크 군은 패퇴하고 그 잔병이 다마스쿠스, 사파드, 가자, 심지어 일부는 이집트에 닿았으나 

순쿠르 병력의 분전으로 반격에 성공해 승리하였다.


1286년 여름, 시리아 순행에 나선 칼라운은 

10월5일까지 가자에 장기주둔하였고 카라크를 들른 후 15일만에 다시 가자로 돌아왔다. 

11월4일 부관 키토부카 알 만수리가 합류하자 칼라운은 그와 카이로로 귀환하였다. 

1289년 트리폴리를 함락한 칼라운은 이듬해 아크레 원정준비 중 사망하였고, 

그를 계승한 칼릴은 1291년3월 대군과 함께 출정하여 가자에 주둔하였다. 

그곳에서 카라크의 아미르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와 합류한 칼릴은 4월 초엽 가자를 떠나 아크레를 포위하였고, 

격전 끝에 함락시키며 십자군을 일소하였다.


3.5. 맘루크 왕조

1260년부터 시작된 맘루크 지배기에 가자는 시리아로 향하는 이집트의 관문이었다. 

1277년 맘루크 조는 가자를 주도로 한 동명의 주를 세웠고, 

이 맘라카트 가자는 라파에서 카이사레아 해안과 헤브론 산지에 이르는 내륙을 관장하였다. 

가자 외의 주요 도시로 룻, 라믈라가 있었다. 

1294년 가자는 대지진을 겪으며 파괴되었다. 

같은해 가자를 중심으로 술탄 알 아딜 키트부가에 대한 음모가 있었으나 실행 전에 발각되어 진압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1299년 말엽 시리아를 침공한 일 칸국의 가잔 칸은 

3차 홈스전투에서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맘루크 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외침에 직면한 가잔 칸은 이듬해 초엽 물라이 휘하 1만 병력을 두고 회군하였다. 

1300년 물라이 역시 팔레스타인 일대를 약탈한 후 회군하였고, 

이로써 대지진 후 맘루크 당국에 의해 복구된 가자는 다시 파괴되었다. 

그 직전에 방문한 시리아인 지리가 앗 디마슈키는 

가자를 '나무가 풍성하여 꼭 땅에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아 보이는 도시'라고 묘사하였다. 

1302년 레반트 최후의 십자군 요새인 루아드가 함락되고 

이듬해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맘루크 군이 몽골군에 대승을 거두며 

가자에 대한 몽골-십자군의 위협 역시 종식되었다.


1307년 가자의 총독 (나이브)로 부임한 바이바르스 알 알라이는 

전란으로 폐허 상태이던 기존 십자군 성채를 재건하였고, 가자 대사원을 보수하였다. 

후자엔 그의 공적을 기리는 대리석판이 남아있다. 

그는 1309년 바이바르스 2세의 쿠데타 직후 해임되었으나 

이듬해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복위를 도와 홈스 총독으로 봉해졌다. 

앗 나시르의 복위 시에 가자는 그를 지지한 도시들 중 하나였고, 

1310년 그곳에서 앗 나시르는 바이바르스 2세를 격파하였다. 

사로잡힌 바이바르스 2세는 가자에 감금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앗 나시르의 복위 후 

그는 바이바르스 2세의 친구였음에도 자신의 편에 선 아미르 산자르 알 자울리를 

카라크에 이어 1311년 말엽 가자의 총독 겸 두 성지 (알 아크사와 헤브론)의 관리자로 봉하였다. 

1311 ~ 1320년과 1342년 총독을 지낸 아미르 산잘 알 자울리의 시기에

가자는 번영하는 무역도시로 변모하였고, 

현존하는 맘루크 시기 건축물 대부분이 그의 부임기에 연혁을 둔다. 

맘루크 역사가 알 마크리지에 의하면 

그는 가자에 많은 건축물을 지었고, 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성채, 마리스탄(병원), 시장, 칸(카라반사라이), 마드라사, 모스크, 하맘(목욕탕), 그리고 경마장 등이 세워졌고 

십자군-아이유브기에 상대적으로 괄시되었던 도시는 번영하는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다마스쿠스 주에 속한 가자의 총독이 지나친 권력을 지닌 것은 

다마스쿠스 총독 텐키즈 알 후사미의 견제로 이어졌고, 

1320년 그들은 한 저택 매각 문제로 충돌하였다. 

이에 대해 술탄 앗 나시르가 텐키즈의 손을 들어주며 알 자울리는 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8년간 감금되었고, 

1329년에야 석방되었다. 

한편 1332년 말엽 아미르 타이날 알 아슈라피의 부임과 함께 반포된 술탄의 칙령에 따라 

가자 총독은 다마스쿠스 총독 대신 카이로의 술탄에 직접 귀속되는 등의 특권을 잃었다.


1340년 텐키즈, 이듬해 앗 나시르의 사후 1341/2년 알 자울리는 

후임 술탄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 의해 재차 가자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3개월만에 해임되었다.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가자는 주민 대다수를 잃었고, 

1352년에는 (메마른 팔레스타인에선 드문) 대홍수를 겪었다. 

그럼에도 1355년 가자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도시가 넓고 인구가 많았으며, 많은 모스크가 있었지만 (주변을 두른) 성벽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유서깊은 대사원은 현재 아미르 자울리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내 동부에 위치한 앗 다파르 다므리 모스크[10]

1380년대 초반 가자 총독 아크부가 사파위는 술탄 바르쿠크에 대한 역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는 발각되어 사파위는 카라크로 유배되었고, 후삼 앗 딘 이븐 바키쉬가 가자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안가 가자는 반란을 일으킨 얄부가 앗 나시리에게 무혈점령되었고, 

후삼 앗 딘은 성문에서 선물을 대동한 채 그와 만나 평화를 제의하였다. 

1389년 복위한 바르쿠크는 이듬해 가자를 회복하였다. 

1401년 메뚜기떼가 창궐해 가자 일대의 농지를 파괴하였다.


15세기 반란을 일으킨 칸수와 캄시야는 

경쟁 아미르 아크비르디에게 패배한 후 가자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패하고 죽었다. 

1428 ~ 1433년 가자 총독을 맡은 아미르 사이프 앗 딘 이날은 20년 후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1455년 그의 다와다르 (비서실장)는 슈자이야 구역에 비르다크 마드라사를 건설하였다. 

그밖에 맘루크 시기에 슈자이아 구역에는 

14세기에 세워진 이븐 우스만 모스크, 앗 자쿠르디므리 모스크와 

15세기의 마흐카마 모스크 등 많은 사원들이 세워졌고 점차 기존 도심과 함께 광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3.6. 오스만 제국

1516년, 버려진 항구를 지닌 작은 도시로 전락해 있던 가자는 다른 시리아 지역과 함께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안정을 가져온 오스만 조를 환영하였고, 

그 치하에서 팔레스타인은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하의 6개 산작들로 분할되었다. 

그중 가자 산작은 자파 ~ 라파의 해안과 베이트 지브린까지의 내륙을 관장하였다.


1524 ~ 1550년까지의 산작베이는 

예니체리 장교 출신으로 쉴레이만 1세의 내각에서 와지르까지 역임한 카라 샤힌 무스파타였는데, 

이집트 총독에 봉해지기 전에 우선 맡은 것이었다. 

다만 그는 이집트 총독을 맡은지 3년만에 셀림 2세에 의해 해임되었으며, 얼마 후 사망하였다. 

예멘의 재무관을 지내다 무스타파의 이집트 전임 후 가자를 맡은 그의 아들 리드완 파샤의 시대부터 

가자 산작은 점점 자치 공국이 되어갔다.


3.6.1. 리드완 가문

13세기 바이바르스[11]가 세운 건물을 17세기 아흐마드 파샤가 증축한 카스르 파샤

1799년 나폴레옹이 3일간 묵기도 하였다.[12]


리드완 파샤는 후에 예멘 총독에 올랐으나 2년 후 해임되자 기존 임지로 복귀하였다. 

그후 에티오피아, 바스라, 디야르바크르 총독을 거친 그는 

1579년 사파비제국 원정 당시 성공적으로 군단을 지휘하였다. 

상으로 아나톨리아 주에 봉해진 리드완 파샤는 15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아흐마드 파샤가 가자 산작베이 직을 계승했으며, 

가자는 한세기간 이어진 리드완 '왕조'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인구는 약 6천명이었다. 

아흐마드 파샤는 나블루스 혹은 예루살렘 산작을 병합하는 등 30여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1601년 그는 코스탄티니예의 여러 와지르 및 관료들에 로비한 결과 다마스쿠스 총독에 올랐고, 1607년 사망하였다. 그를 계승한 아들 하산 파샤는 '아랍 하산'이라 불렸는데, 

17세기에 이르면 리드완 가문은 이미 베두인들을 장악하고 또 그들과 친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오스만 베두인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반기를 든 파크르 앗 딘 2세에 대한 원정에 종군하였고, 

이때의 공적으로 트리폴리 총독에 봉해졌지만 1644년 해임되었다. 

많은 부인과 첩을 얻은 하산 파샤는 슬하여 85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는 군사적으로 리드완 가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많은 빚을 남기며 부담을 주었다.


하산 파샤의 후, 

당시 나블루스와 예루살렘의 산작베이를 지내던 아들 후세인 파샤가 재정위기에 처한 가자 산작베이에 올랐다. 

그는 (한시적으로 가자 산작까지 포괄하던) 시돈 총독 하산 아가의 증세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그럼에도 후세인 파샤의 재임기는 가자에 있어 평화로운 번영기였고, 

그는 정주민들과 근교 베두인 간의 갈등을 크게 줄였기에 좋은 명성을 얻었다. 

도시의 빠른 회복을 상징하듯,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지목된 가자에선 대사원이 보수되었고 

그외에 6개의 모스크가 신설되었으며 터키탕(하맘)과 시장 좌판들이 확산되었다. 


1660년 후세인 파샤는 아들 이브라힘을 가자와 예루살렘 산작베이로 임명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이듬해 이브라힘이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 토벌에 투입되었다가 전사하자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1662년 후세인 파샤의 핫즈 카라반 보호 실패 및 친기독교 경향을 불평하는 

다마스쿠스발 익명 청원이 접수되자 포르테 (오스만 조정)은 이를 핑계로 그를 해임하였다. 

후세인 파샤는 곧 다마스쿠스에 감금되었고, 그의 자산들은 에얄레트 관료들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후 코스탄티니예로 이송된 그는 1663년 옥사하였다. 

뒤이어 가자의 산작베이에 오른 동생 무사 파샤는 

포르테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프랑스, 반기독교 정책을 폈다. 

한편 부임 직후 무사 파샤는 대사원의 보수를 지시하고 자신의 이름을 미흐랍 표면에 새겼다. 


그의 부임기에 가자는 여전히 번영했지만, 이는 전임자인 후세인 파샤의 덕이었다. 

1679년 무사의 죽음 후 가자의 경제와 정치적 지위는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초에 이르면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1690년 무사의 아들 아흐마드 파샤 2세의 죽음과 함께 리드완 가문의 가자 지배는 종식되었다. 

리드완 조는 팔레스타인 남부를 통합한 첫 자치국가로, 한세기 후 북부를 통합한 자히르 알 우마르와 비교된다.


6.2. 근대

1723년 포르테는 나블루스 기반 투칸 가문의 살리흐 파샤 투칸을 가자와 다른 두 지역의 산작베이로 봉하였다. 

그는 1742년 사망 시까지 맡은 산작들을 다스렸다. 

1743년 다마스쿠스 총독 쉴레이만 파샤는 예루살렘, 트리폴리와 가자의 병력까지 더하여 

갈릴리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 토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던 1757년 말엽 현지 베두인 부족들이 

메카 순례 카라반을 습격, 수천을 살상하고 낙타에 운반하던 1만3천여 점의 물품들을 약탈해 가자의 시장에 가져왔다. 이로써 도시의 부는 일시적으로 크게 치솟았다.


비슷한 시기 자히르 알 우마르의 세력확장과 함께 1763년 가자주민들은 대오스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766년에는 이집트에서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맘루크 알리 베이 알 카비르가 가자로 피신해 오기도 하였다. 

이때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는 그의 축출을 명하였고, 이로써 알리 베이와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770년11월, 알리 베이는 우스만 파샤에 맞서는 자히르를 돕기 위해 가자에 2만 대군을 파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771년 자히르는 우스만 파샤를 격파,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고 

가자에서 시돈에 이르는 해안을 장악하였으나 4년 후 토벌당하였다.


1799년, 이집트 원정 중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던 나폴레옹은 

가자를 지나며 '아프리카의 교두보, 아시아로의 관문'이라 지칭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다가오자 주민 대부분은 도주하였고, 나폴레옹은 손쉽게 잔존하는 도시 성벽[13]을 철거하였다. 

다만 같은해 아크레 공방전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며 도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832년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후 가자 역시 그 지배 하에 놓였다. 

이듬해 메흐메트 알리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에게 가자의 목화[14] 수확물을 구매하지 말고,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처분하게 하였다.


1838년 미국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가자를 방문, 인구 밀도가 높으며 예루살렘보다 큰 도시라고 기록하였다. 

가자의 구도심은 언덕 위에 놓여 있으며, 그 교외 지역은 주변 평지에 위치하였다. 

또한 그는 가자의 토양이 기름져 살구 & 오디와 같은 맛있고 풍족한 과실수들을 길러낸다며, 

비록 항구는 비활성화 되었지만 도시는 이집트-시리아간 카라반 노선에 입지한 덕에 

무역과 상업 및 베두인과의 교역을 위한 비누 & 목화 생산으로 이익을 보았다고 평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빈슨은 지속적인 갈등과 점령으로 거의 모든 고대사와 고전기의 자취들이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당시 산작베이는 셰이크 사이드였고, 인구는 약 1만5천명이었다.


1839년 흑사병의 재발과 정치, 경제적 안정의 부족으로 가자는 쇠퇴하였다. 

1840년에는 이집트 군과 오스만 군이 도시외곽에서 전투를 벌였고,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메흐메트 알리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막을 내렸다. 

역병 직후 겨우 회복 중이던 가자는 양측의 전투로 더 많은 인명손실과 파괴를 겪었다. 

한편 레반트 해안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과 함께 1865년 성 포르피리오스 성당이 보수되었고 

1876년 프랑스인 오리엔탈리스트 샤를 클레르몽-가뉴가 

가자를 방문해 상당 규모의 동로마 명문들을 모아 도록화하였고 대사원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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