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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3-12-09 19:23 View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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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선왕실의 수많은 노비는 누가 어떻게 조달했나?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3.12.09. 09:3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4회>


조선은 유교의 이상을 내건 군주제 국가였다. 

유가의 교리에 따르면, 

임금이란 하늘을 받들어 온 백성을 돌보는 혜민(惠民)의 영수(領袖)이자 성인(聖人)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일깨우는 교화(敎化)의 사표(師表)이어야 한다. 

물론 현실의 군주가 유교의 이상을 몸소 실현한 사례는 드물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유교를 국시(國是)로 내건 한 나라의 국왕이 

어떻게 인구의 절반이 노비가 되는 현실을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할 수 있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조선 전기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조선이란 나라에서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주체는 

조선의 정부이며 조선 왕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 최대의 노주(奴主)는 조선 왕실

15~16세기 중앙 정부의 각 기관에 소속된 이른바 각사(各司) 노비는 대략 23만~27만을 헤아렸다. 

왕실재정을 맡은 내수사(內需司)나 궁방 소속의 내노비(內奴婢) 혹은 왕실노비도 

정확한 수를 알 순 없으나 상당한 규모라고 짐작된다. 

아래 살펴보겠지만, 

왕실은 정부에 속한 각사 노비를 왕실 소속의 내수사로 끌어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썼다. 

가령 다음 문서를 살펴보자.


1631년2월28일 국왕 인조(재위 1623-1649)가 

둘째 아들 봉림대군(1619-1659)에게 53구의 관노비(官奴婢)를 하사할 때 작성한 교지(敎旨). 

/'조선시대 상속문서, 분재기'(장서각, 2014), 28쪽


위의 문서는 봉림대군(1619-1659)이 14세 나던 1631년에 그의 부친인 인조가 직접 내린 교지(敎旨)이다. 

여기서 교지란 국왕의 명령이나 의중이 담긴 공식문서를 지칭한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1636-1637) 이후 그의 형 소현세자(1612-1645)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인물이다.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1649년 왕에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북벌을 내걸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동법을 확대·실시했으며,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했다는

바로 그 효종(재위 1649-1659)이다.


인조는 1631년2월28일 3장, 1632년1월10일 다시 2장의 교지를 작성하여 

갓 봉작(封爵)을 받은 10대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모두 250구의 노비를 하사했다. 

위의 문서는 1631년 발급된 교지로 50명 노비의 지역, 이름, 출생 연도가 열거되어 있다. 

250명 노비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정부 관사에서 복역하는 관노비들이었다.


이 문서는 인조가 전국 여러 지방 관사에 소속돼 있던 관노비들을 

둘째 아들 몫으로 돌려서 상속한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250구의 관노비들이 일개 왕자의 사유물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관사에 소속된 노비가 왕명에 의해 왕자의 소유물로 전환되면 해당 관사의 업무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왕실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승정원일기>> 1631년3월14일 기사를 보면, 

인조의 왕명으로 비(妃) 4구를 잃게 된 의금부가 

타사의 노비로 대신 써달라고 건의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는 기록이 보인다. 

표면적으로 봉림대군에게 하사된 노비 중에서 등 의금부 소속의 네명 계집종은 

신역(身役)을 피해 도망한 전력이 있는 불온한 인물들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론 해당 관사에서 부릴 수 있는 노비 수가 줄어드는 데에 대한 관료적 저항이라 볼 수 있다.


왕족의 수족 노릇을 하던 왕실 노비는 엄밀히 말해 정부의 공복이라 할 수가 없다. 

아래 상세히 보겠지만, 

1502년(연산군8년)7월5일 영의정 한치형(1434-1502)은 

왕실 재정을 맡은 관청 내수사(內需司)의 노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정부의 각 기관과 내수사를 비교하면 경중이 판연합니다. 

내수사는 노비가 없어도 되지만, 정부의 각사(各司)엔 노비가 없어선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 내수사의 노비가 다 없어진 것도 아닌데, 

다시 각사의 노비를 빼앗아 여러 군(君, 왕자)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한치형의 이 발언은 

왕실이 정부 각 기관에서 수족처럼 부리는 관노비를 빼앗아 사유화하는 관행을 질타한 것이다. 

어느 왕조나 세대가 늘어날수록 왕족자손에 대한 예우가 큰 골칫거리였다. 

일례로 1620년대 10만명에 달하는 명나라 황족은 통상적으로 집안에서 내시를 노예처럼 부렸고, 

그 까닭에 전국의 내시가 10만명에 달했다. 

명나라와 달리 조선 전기 왕실의 내시는 그 수가 대략 140~160명 정도였다. (홍순민, 2004). 

대신 노비를 부렸던 조선 왕실은 노비를 늘리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기록이 다수 보인다.


봉림대군에게 하사된 250구 노비는 조선왕족의 전례에 비춰 특별히 많은 수라 할 순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 

세종(재위 1418-1450)의 아들 중에서 5남 광평대군(1425-1445)과 8남 영응대군(1434-1467)은 

1만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알려진다. 

세자도 아닌 이 두 왕자가 이토록 많은 노비를 소유한 까닭은 무엇인가? 

학계에선 흔히 두 왕자의 부인들이 각자 친정에서 많은 노비를 상속받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송수환, 1990)


조선 왕실은 원하는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 있는 “늑혼(勒婚, 강제 혼인)”의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 관례에 따라서 조선 왕실은 대개 부잣집과 혼사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왕족의 재력이 크게 불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학계의 설명은 일면 그럴싸하지만, 더 큰 의문을 남긴다.


12회에서 살펴보았듯, 

재령 이씨 이맹현의 집안이 소유한 노비 758구가 현전하는 15세기 기록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기 때문이다.

758구는 1만구의 7.5%에 지나지 않는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단순히 처변(처가 친족)의 재산만으로 두 왕자가 1만구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맹현 집안의 노비는 758구였지만, 이를 9남매 각각 상속받은 수는 평균 80여명 정도였다.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처들도 다 형제자매가 있었을 텐데 

과연 1만명에 달하는 노비를 상속받을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두 왕자가 왕실 자체에서 상속받은 노비의 수가 본래 적잖았으며, 

이후 적극적인 가계 경영으로 계속 노비의 규모를 확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1만명이 정확한 숫자라면, 

그것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던 조선왕실이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선왕실은 

정부 여러 관사의 공노비나 한미한 집안의 사노비를 다양한 방법으로 유인하여 빼앗는 관례를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실재정과 노비의 역할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 17세기 무렵 명나라 황실은 

자금성에 1만명의 내시를, 전국적으로 10만에 달하는 내시를 

수족(手足)과 이목(耳目)처럼 부리며 황실재정을 운영했다. (Tsai, 1991) 

오늘날 영국왕실의 재정은 군주기금, 내탕금과 왕의 개인 재신으로 꾸려진다. 

어느 왕실이나 튼튼한 재정이 없다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전기 왕실은 크게 

민간의 특정 토지에서 조세를 징수하고,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 

노비를 직접 부리거나 신공(身貢)을 받아서 재정을 유지했다. 


왕실이 조세를 징수하거나 이자를 받아낼 때는 보통 왕실 노복이나 위차라 불리던 서리들을 내려보냈다. 

노복과 서리는 왕실의 위세를 등에 업고 백성을 가혹하게 침탈하여 원망을 사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1443년 세종은 왕실의 고리대를 금지하였고, 16세기부터는 왕실의 수조권도 대폭 축소되었다. 

(송수환, 1990; 박성준, 2017)


대신 왕실은 어장, 염전, 토지 등을 확보하여 살림을 꾸려나가다가 

임진왜란(1592-1598) 이후부터는 

무주(無主)의 황량한 땅을 궁방전(宮房田)이라는 이름으로 확보하여 재정을 운영했다. 

궁방전의 관리에서도 왕실은 여전히 노복이나 서리에게 징수 업무를 위임했는데, 

17세기 중엽 이후 이들은 도장(導掌)이라 불렸다. 


왕실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도장의 횡포는 뭇 백성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 상당수 보인다. 

예컨대 1660년 충주에서 80여명의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헌부에 민간의 토지를 침탈하는 도장의 횡포를 고소했다. 

1694년에도 과도한 징수에 격분한 전라도 무장, 영광, 장성 지역 사람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박성준, 2017)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도장의 무도한 행동이라기보단, 재정난에 처한 왕실이 수족을 압박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왕실은 부득이 노비의 확충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녀는 노비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먼 친족에게서 증여받는 기진(寄進)이나 11회에서 보았든 

직접 노비를 사들이는 매입의 방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노비를 빼앗아 점유하는 탈점(奪占)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노비 탈점의 주체는 주로 왕실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였다. 

내수사는 공·사노비를 유인해서 빼돌리는 방법으로 왕실 노비를 늘렸다. 

도망치거나 호적에서 누락된 노비를 샅샅이 뒤져서 잡아 오는 추쇄(推刷)도 노비확충의 주요한 방법이었다.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서 빼돌려 내수사에 귀속시킬 때는 주로 진고(陳告)의 방법이 사용됐다. 

진고란 주변 사람들이 관아에 부정한 사실을 고발하는 행위를 이른다. 

신분을 세탁한 노비나 호적에서 누락된 노비를 가족·친지·이웃 등 주변 사람들이 관아에 고발하면 

포상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왕실이 내수사의 종들을 시켜서 적극적으로 노비 확충에 나섰던 정황도 읽힌다.


내수사의 ‘간교한’ 사내종 흥수 이야기

<<성종실록>>에는 내수사의 사내종 흥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흥수는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는 공·사노비들에게 몰래 접근하여 고발장을 내도록 꼬드긴 후 

내수사의 선두안(宣頭案, 노비 명부)에 올리는 방법으로 왕실 노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주인을 배반하려는 사천(私賤)과 본역(本役)을 피하려는 관노들이 

흥수에게 왕실 노비가 되기 위해 뇌물을 썼을 정도였다.


흥수는 연산군(재위 1495-1506) 때에도 계속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했다. 

결국 1502년 조정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로 유형을 받았다. 

흥수에 관해서 사신(史臣)은 간힐(奸黠, 간사하고 약삭빠른)한 인물이라 기록했다. 

1497년(연산군3년)1월13일 기사엔 

모계(謀計)를 써서 성총(聖聰, 임금의 총명함)을 흐린 흥수는 

진(秦)나라를 망친 환관 조고(기원전 207 사망)보다 더 간악한 인물이란 대간(臺諫)의 평가도 실렸다. 

대체 일개 노비의 악행이 어떠했기에 조고에 비견되었을까?


종실록 (오대산본) 표지와 권51 본문시작 부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왕의 수하에 놓인 내수사 노비들은 그야말로 왕권의 기반이었다. 

예컨대 1492년(성종 23년)2월7일 내수사 노비의 부역 면제를 두고 성종과 신하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신하들은 

내수사 노비는 잡역이 없어서 여러 공·사노비가 호시탐탐 내수사에 들어오려 하는데, 

내수사 노비의 부역을 또 덜어주면 다른 백성에게 피해가 간다며 성종을 압박했다. 

성종(재위1469-1494)은 

내수사 노비들이 둘째 아들 계성군(1480-1504)의 집을 짓고 있어서 잠시 부역을 면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신하들은 오히려 왕자녀인데 지나치게 크고 높다며 따졌고, 

성종은 창경궁을 짓고 남은 목재를 써서 그렇게 되었다고 항변했다. 

신하들은 

왕실건물을 지을 때는 내수사 종들을 쓰지 말고 정식으로 토목사업을 관장하는 선공감(繕工監)에 맡기라며

성종을 다그쳤다. 

이에 대해 사신(史臣)은 다른 왕자녀의 집도 계성군의 집처럼 크게 짓다 보니 

충청도, 황해도의 목재를 운반하는 수레가 줄을 잇고 선박이 꼬리를 물었다고 힐난조로 기록했다.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하는 흥수의 활약상은 

<<연산군일기>>에도 보이며, <<중종실록>>에도 그의 악행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특히 1497년(연산군3년)1월6일 대간(臺諫)은 

흥수가 포상을 노리고 문서를 조작하여 서울과 지방의 공노비들을 내수사로 이적시키고 있다며 

법에 따라 그를 벌해야 한다는 서계(書啓, 보고서)를 올렸다. 

물론 희대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연산군은 대간의 충언을 무시했고,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하는 흥수의 행적은 1502년 다시 조정에서 거론되었다. 

1502년(연산군8년)7월5일에는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조정의 삼정승(三政丞)이 작심하고 

흥수와 작당하여 5백여명의 노비를 불법으로 소유한 내수사의 서리 최자호 무리의 곤장을 치고 

전 가족을 유형에 처하라 간언했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 72, 조선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관아 내수사가 있던 터. 1907년에 폐지되었다. /공공부문


놀랍게도 연산군은 다른 무리는 모두 유배를 보내라 명했지만, 흥수만은 지키려 했다. 

영의정 한치형은 흥수는 간사한 꾀가 극심하여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며” 거듭 흥수를 벌하라 요청했고, 

연산군은 결국 못 이기고 흥수를 유형에 처하라 명했다. 

삼정승이 나서서 흥수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 요구하고, 

연산군은 완강히 버티며 흥수를 곁에 두려 했다는 사실은 

왕실과 조정 사이의 이해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정사(正史)에서야 흥수가 모계를 써서 성총을 가린 악한으로 묘사되지만, 

왕실이 더 많은 노비를 갖기 위해 내수사의 종과 서리를 다그치고 포상했음이 분명하다. 

흥수와 결탁한 내수사의 서리가 무려 500여명의 노비를 사유화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조선왕실의 부패상은 실로 드라마 작가의 상상을 초월한다.


15~16세기 조선의 왕실재정은 정부 재정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 재산에 기초했으며, 

내수사 소속의 대규모 노비군단이 왕실재정의 중추였다. 

최근 이메일 교신에서 한국 노비제의 대가 이영훈 교수가 제기한 질문이다. 

“조선의 역대 국왕이 

모든 백성을 공민(公民)으로 지배하지 않고, 그 절반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양반관료들과 분할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계속>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박성준, “17~18세기 궁방전에서 도장(導掌)의 발생과 역할,” <<역사문화연구>> 64 (2017): 43-82.

송수환, “조선 전기의 왕실 노비,” <<민족문화>> 13 (1990): 67-102.

염정섭,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궁방전의 변화 추이,” <<인문학연구>> 60 (2020).

이영훈, <<한국경제사(I):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일조각, 2017).

문숙자, 안승준 논고, <<조선시대 재산상속 문서, 분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홍순민, “조선왕조 내시부의 구성과 내시 수효의 변천,” <<역사와 현실>> 52 (2004): 219-263.

Robert B. Crawford, “Eunuch Power in the Ming Dynasty,” 

T’oung Pao, 49.3 (1961): 115-148.

Shih-shan Henry Tsai, “The Demand and Supply of Ming Eunuchs,” 

Journal of Asian Studies, 25.2 (1991): 121-146.

댓글목록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아이피 115.♡.168.73 작성일

조선왕조는 '주자성리학'의 탈을 쓰고 백성 얼반을
왕실과 양반세도가의 재산분할 쟁탕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근래의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국민, 사업가와 금융계의 얼반을
정계와 관료계가 재산분할 쟁탈전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비슷하다
부동산 금리 세금 허가권, SOC(사회기반시설)건설 등이 수단이고
선출직 정계,학계, 검경법조계, 노동계, 언론계 등은 동원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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