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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던 짓을 하세요 조금 더 건강해집니다
[아무튼, 주말] [오지윤의 리빙뽀인뜨] 남은 한달, 뭘 할까?
오지윤 작가 2023.12.02. 08:50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한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 사실을 비꼬는 말이다.
세상은 안 하던 짓을 하기 점점 더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유튜브는 내가 자주 보는 것만 틀어주고,
인스타그램에는 화장품 광고만 지겹게 올라온다.
내가 몇번 화장품 광고를 눌렀다는 것과 30대 여성이라는 것을 근거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는 아주 단조로운 인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강화도에 가서 노을이 보고 싶다.”
아빠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는 좀처럼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끔 걷고 싶어질 때면, 부엌과 거실을 스무 바퀴씩 돌아다닐 뿐 밖으로 나가지 않는 집요한 사람이다.
그런 아빠가 먼저 ‘노을’을 보고 싶어하다니.
무려 ‘강화도’까지 가자고 하다니.
그 기념비적인 카톡을 캡처해 두었다.
동시에 어떤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의 심경에 불길한 변곡점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만큼 뜻밖의 제안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강화도에 갔다.
구름이 가득해서 석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내가 고른 카페는 특이했다.
마당에 있는 텐트 안에서 석양을 감상하는 곳이었다.
그날, 나의 부모는 초등학생 이후 처음으로 텐트라는 것에 들어갔다.
춥다고 투덜거렸지만 내심 좋아하는 것 같았다.
추운 날, 어른들을 따뜻한 실내 공간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지만 우리는 다른 길을 택했다.
옹기종기 붙어서 흐린 하늘을 함께 바라봤다.
“아빠, 흐린 석양이라서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거야.”
나는 아빠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나라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쉽지는 않다. 나에게도 ‘안 하던 짓’이다.
“행복해.”
늦은 나이에 나오는 여성호르몬 탓인지 부쩍 온순해진 아빠는
나의 부탁대로 ‘행복해’라는 세 글자를 발화해 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소리내서 말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그 세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내보는 것 역시, 그에겐 절대 안 하던 짓이다.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고 새로운 패턴으로 사고하면,
뇌의 시냅스가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개척한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천재가 되거나,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체 운동을 하면 허벅지가 굵어지듯, 뇌도 건강해질 길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엄마는 집안의 재정과 살림의 최전방에서 계속 새로운 퀘스트(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헬스장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이웃집 아주머니를 따라 새로운 걸 배워 오기도 한다.
그녀의 뇌에서는 매일 새로운 길이 생겨나고 있겠지.
작년 여름, 나는 9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퇴사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까 봐, 퇴사 생각이 들 때마다 억눌러 왔었다.
그렇지만 퇴사라는 건 허무할 만큼 별일 아니었다.
물론, 출퇴근이 없는 일상과 혼자 하는 업무는 적응이 필요했다.
그해, 나의 뇌에는 매일 불꽃놀이가 일어났을 거다.
새로운 패턴과 감각에 맞춰 뇌구조도 바뀌어야 했을 테니까.
번거로운 변화 때문에 “힘들다”고 내뱉을 일이 있다는 건, 나의 뇌가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익숙함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굳이 나를 못살게 굴며 살 생각이다.
내 몸뚱어리 중에 죽는 날까지 성장할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은 틀리다.
사람은 계속 변하고 ‘나’ 역시 계속 변해간다.
내가 달라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버려둘지,
아니면 부지런히 새로운 기회를 주며 살아갈지.
둘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유지만, 언제나 번거로운 쪽이 건강에 좋은 법이다.
강화도에서 오들오들 떨며 노을을 봤던 그날, 우리 가족도 조금은 건강해졌다고 믿는다.
검은색 패딩만 입어봤다면, 올겨울엔 파란색 패딩을 사 입어 보는 것도 좋다.
소설만 읽는 당신은 비문학을 읽어보는 것이 좋고,
재테크 서적만 읽는 당신은 소설을 읽어 보는 것이 좋다.
남은 2023년은 안 하던 짓을 해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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