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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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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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조선 국왕 (출생1752년~사망1800년, 47세, 재위 1776년~1800년)
전임 영조, 후임 순조
친부 : 사도세자, 생모 : 헌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 배우자 효의왕후 김씨, 자녀 · 순조 · 숙선옹주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청명당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소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특히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재위 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론 내 소수파였던 북학파 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정조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기 이전 원손(元孫) 시절 큰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년10월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元孫이 되었다.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755년(영조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영조 37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할아버지 영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상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
사도세자는 노론이었던 홍봉한 가문을 처족으로 맞이하였지만
대리청정을 하면서 소론에 우호적이었고, 노론과는 충돌을 거듭하여 영조와 불화를 자초하였다.
또한 관서행, 서연 불참, 기녀들과 풍류를 즐기는 등 문제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영조 스스로가 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
1762년(영조38년)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치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고,
윤숙, 권정침 등이 세자 구명을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세손 시절
생부 사도세자
1761년(영조37년), 세손은 관례를 치르었다.
관례식에서는 대재학 김양택이 지은 반교문이 낭독되었는데,
나라의 맏손자로서 대통을 이을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있었다.
1762년 2월 훗날 김시묵의 딸을 세손빈으로 맞아 가례를 올렸으니 뒷날의 효의왕후이다.
1762년(영조38년),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세손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혜경궁 홍씨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1764년(영조40년),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첫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이었으나 아홉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효장세자의 빈이었던 효순왕후 역시 정조가 태어나기 전인 1751년(영조27년) 별세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양자 입적은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세손시절의 사부의 한사람인 김종수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
즉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
김종수는 군사부(君師父)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김종수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하들이
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후일 임금으로 즉위한 뒤에도 통치자이면서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려 했고,
스스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었다.
정조는 사서오경에서 춘추, 진서, 한서부터 중국의 사서부터 국내의 사서와 한글소설, 의사들이 쓴 의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다.
김종수의 존재는
본인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홀로 튀는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때까지 비판 일색이었지만,
정조에 대한 김종수의 구상, 이미지메이킹은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
자신의 이론대로 김종수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들 조차도 불경한 뜻을 품은 자들이라며 공박했고,
사도세자(장조)의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노론 시파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세손일 때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할 때 소수의 노론내 인사들과 이를 극력 반대했으며,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소론 등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세손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는 학습을 하였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이라고 하였다.
세손 역시 사도세자와 같이 서연을 열었고,
서연을 전담하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원래는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던 기관인 세자익위사의 문관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서연에서 강론된 책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과 같은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하여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고
열살 이후로는 《사략》, 《강목》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강론하였고
열일곱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와 같은 것을 또 다시 별도로 강론하여
하루에 세 번의 서연을 여는 강행군이었다.
서연은 존현각에서 행해졌고, 주변에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와 같은 누각들에 책을 비치하여 도서관으로 삼았다.
1774년 정조는 《경희궁지》를 지어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 공부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경학 못지 않게 무예의 단련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대리청정
노론 벽파계열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썼다.
특히 홍국영은 그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만한 자료,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고,
세손 시절 사부인 김종수는 당론에 맞서며 택군이라며 벽파를 공격했다.
한편 김종수는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또 다른 정파 청명당 혹은 청명파를 구성한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비롯한 조정, 김치인, 정존겸, 이명식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두자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의 고사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하니,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소론과 노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영조 125권, 51년11월20일(계사)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조 또한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
즉위 초기 > 아동 정책
정조는 또한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시하였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임금님을 대하듯이 우러보아야 하며
이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은 실천 되고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심지어 엎드려 절까지 했다고 한다.
“과인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
— 조선왕조 실록, 정조1권, 3월10일(신사)
정조는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정조의 이런한 천명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던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
생부인 장조(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숭하였다.
그러나, 생부를 장헌으로 추숭하는 것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 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생부의 추도사업을 할 뜻이 없음을 함께 내비쳤다.
이는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보내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신하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홍봉한의 사형도 요구하였으나
어머니 현경왕후가 단식을 하며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장조(사도세자)의 추숭과 복권은 정조의 오랜 숙원이었으나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고
영조가 장조(사도세자)를 죽인 “임오년 처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 역시 이 일을 언급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정조 즉위 직후
노론 측이 장조(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재조사를 요구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앞장세워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정조는
소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들의 의구심을 풀 수 있었지만, 사실상 정적인 노론 벽파를 견재할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다시 추숭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뒤로 13년이 흐른 뒤였다.
정유역변
1777년(정조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홍술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을 뿐 모두 제거되었다.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다시 도승지로 올렸고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하여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소계,
8도의 장첩(지방 관리가 올린 보고서),
묘염(의정부에서 천거하여 관리를 뽑는 일)
전랑(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5품관인 정랑과 정6품관인 좌랑직의 통칭) 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홍국영의 이러한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기 반대세력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수하였던 윤약연, 홍지해 등을 친국하면서
소론이 홍국영을 제거하려고 한 시도에 대해
세자시절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고 국가 사세의 간난(艱難)함이 어떠했겠는가?”라며
오직 홍국영이 자신을 보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卽祚)한 이후.. 오직 이 하나의 신하를 의지하여 믿고 있는데
기필코 장살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여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에 따라 인사를 전횡하는가 하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간택한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으로 들이는 등 무리한 권력강화를 시도하였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원빈이 왕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어
이를 보복하려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다가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경왕후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자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을 함부로 국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을 앞세워 왕위계승권에 관여하려 한 것도
정조가 홍국영을 축출한 원인이 될 것이다.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
정조는 홍국영에게 백마와 금전을 선물로 주며 낙향시켰다.
홍국영은 낙향한 이후 탄핵상소가 이어져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5년) 사망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탓하였다.
왕권강화와 정치개혁
규장각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은 28수의 규성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규장각에는 두명의 제학과 두명의 직제학을 두었는데,
제학에는 황경원, 이복원을 임명하였고 직제학으로는 홍국영과 유언호를 임명하였다.
네 사람 모두 시파로 정조의 정책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을 관여케 한 점으로 보아
규장각 설치가 처음부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류 신분이었고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1788년, 정조12년) 정조의 최측근이 된다.
창덕궁에 자리잡은 내각 외에 강화도에 규장각 외각을 설치하여 왕실의 책들을 보관하는 한편
제학과 직제학 이외에 직각과 대교를 한명씩 더 두어 모두 6명의 각신을 두었다.
각신들은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으며,
왕과 신하가 대화를 할 때 배석하여 대화를 기록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규장각은 기존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에서 하던 역할을 겸하는 핵심적인 기관이 되었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초계는 본래 의정부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보고하는 제도인데,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40세가 되면 실제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정조 재위기간 동안 초계문신이 된 사람은 모두 138명에 이른다.
초계문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약용, 정약전 형제와 체재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있다.
정조는 초계문신이 배워야할 학문의 강목을 규정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외에도 규장각에서는 《좌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발간하여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규장각의 권한이 커지고 실제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파의 반발 역시 끊임 없이 제기되었다.
1782년(정조6년), 이택징은 상소를 올려
규장각의 각신은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며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경비를 많이 쓴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이 발호하여 자신을 해치려 하였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규장각에서 인재를 살펴 사대부를 가려뽑아 직책에 발탁하고 퇴폐한 문풍을 진착시키기 위해
규장각을 운용한 것이니 결코 폐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규장각의 설치가 근위세력 육성임을 천명한 것이다.
한편, 규장각의 검서와 초계문신 가운데는
당대에 실학을 주장한 문인들로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이들의 문체나 사상에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로 지어진 글들을 잡스럽다고 비판하였고,
문체반정을 통해 옛 문체를 지키지 않은 글을 쓴 문인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자송문을 지어 올리라는 이덕무의 권유에
“학식이 높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이나 남과 다른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소금과 매실에게 왜 너희는 기장과 좁쌀과 같지 않느냐하고 책망하면..
이로 인해 천하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당시 재야에 있었으나 박제가 등과 교류가 깊었던 박지원은
“견책을 당한 사람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며 끝내 자송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진작시키고자 한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 사상의 부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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