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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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영
《무예도보통지》의 삽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기존의 5군영은 외척을 비롯한 여러 권신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인사권 또한 사실상 임금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는 이를 1원화하고자 하였으나
창설의 목적과 규모가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가 쉽지 않자 새롭게 군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30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만8천명까지 늘어났다.
장용영의 장교는 무과를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양반의 서얼과 평민 가운데에서도 급제자가 많았다.
또한, 정예병의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하고
1795년(정조19년) 이순신의 글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이순신의 일기들을 모아 《난중일기》라고 이름붙였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헌릉원을 수원에 이장한 뒤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능행을 명분으로 자주 거둥하였는데,
1795년(정조19년) 을묘원행에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어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원행을 하였다.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원행은 군주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이때의 원행을 기록한 그림이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로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채제공이 그 뒤를 이었다. 반차
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
장용영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정예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조 사후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해체되었다.
화성능행반차도(부분). 가마에 쓰인 자궁(慈宮)이라는 표식은 현경왕후다.
배다리
문득 연산군 시대를 연상시키는 배다리를 한강에 놓는다.
연산군 시대의 배다리는 조운(漕運)에 쓰이는 한강 물길을 오래도록 막는다는 평이 있어서,
정조는 70칸짜리 창고를 지어 배다리에 건설에 필요한 자제와 장비를 보관하며 재활용하여 설계를 발전시켰다.
상설 기관인 주교사를 설치하여 배다리를 관리하였고,
헌릉·영릉·영릉에 갈 때 광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다.
내명부(內命婦)
내명부는 조선시대 궁중에 있는 왕비와 후궁, 그리고 이들을 모시는 여자관리인 궁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정조는 주위의 궁녀들을 통해 정순왕후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보고,
즉위 후 대전 소속의 궁녀를 없애 왕의 주변에 궁녀를 두지 않도록 하였다.
중전 소속의 궁녀도 없애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여러차레 암살 위험에 시달렸는데
즉위 후 일어난 암살사건에 정순왕후 휘하의 궁녀가 관련되었다.
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나이에 66세의 영조의 계비가 되었고,
영조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다.
정조 즉위시 정순왕후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정조와 대척점에 있던 정순왕후는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 도중 사망한 뒤로 정조를 원수로 여겼다.
1786년(정조10년) 김귀주가 사망한 이후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에게서 옹주를 얻었다.
옹주, 문효세자, 의빈성씨가 차례로 사망한 후
12월1일 정순왕후는 한글로 된 교서를 승정원에 보내어 이들의 죽음이 수상하니 범인을 찾으라고 하였다.
정순왕후는 상계군 이담을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시켜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상계군의 아버지인 은언군을 죄인으로 몰았다.
은언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정조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이복동생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였다.
은언군은 결국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
훗날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손자 원범이 순조의 손자 헌종을 이어 철종으로 즉위한다.
1800년(정조24년) 정조는
법적으론 할머니이자 왕실에선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안동 김씨 가문인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다.
조선왕조의 가례는 세번 간택하여 왕비를 정하는 삼간택을 하였는데,
정조는 초간택만을 마친 상태에서 승하하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이되자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왕대비로 승격되었으며
대왕대비 (大王大妃) 정순왕후는 초간택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정조의 유지라는 명분에 밀려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노론 벽파가 다시 득세하였지만,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처족인 노론 시파 안동박김 지원을 받아 벽파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승하한 이후 벽파가 시파의 반격으로 사멸되고,
안동 김씨 권력독점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법제 개혁과 내치
정조는 여러 법제를 개혁하여 당시 사회에 대두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으로 육의전 상인에게 주어졌던 독점권을 폐지하였고
격쟁과 신문고를 운영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하는 한편
당시 사회문제인 도망간 노비에 대한 추쇄관 파견을 중지하였고
서얼과 중인의 문제도 개선하고자 하였다.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특정지역에 편중되는 기존의 과거제도를 고쳐
함경도 지역과 같이 그동안 무관만을 선발하던 곳에서도 문관을 선발하였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기득권을 쥐고 있던 노론세력의 반대를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조는 노론을 견재할 세력으로 남인을 중시하고
제반 붕당에서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를 두루 채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인 영수였던 채제공을 등용하는 등 남인을 중용하여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할 수 있었다.
정조는 《대전통편》을 간행하여 자신의 개혁조치가 법제화되도록 하였다.[102]
지방행정에 대해서도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족이 행정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박
제가나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 측근을 지방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시사항의 이행여부와 부정부패를 감시하였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하였는데
재위기간 중 암행어사를 60회 파견하였고, 별건어사를 53회 파견하였다.
파견된 어사 가운데 27명이 초계문신 출신으로 자신의 최측근을 통해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개혁조치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세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체의 1/3을 차지하는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전 문제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정약용은 신분과 지역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쓰자고 제언하였으나
정조 후기까지도 관직은 특정가문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 스스로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에
독살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유봉학은 정조가 급서한 것이 아니라 거의 한달에 가까운 투병이 있었고,
처방에 정조 자신이 관여한 것,
내의원 도제조를 겸고 있어 간병을 지휘한 우의정 이시수는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시파였다는 것을 들어 독살설을 부정하였다.
수은 연기를 쐬는 연훈방을 처방한 의관 심연도 심환지와 성은 같은 심씨이나 일가친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사돈인 시파 김조순 등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되었던
1806년(순조6년)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기에도, 이후에도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 이와 관련된 문제제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이화는 이만수가 쓴 정조 행장에서
“임금은 이해에 경사를 만나서 옛날 일을 회고하여 속을 썩이다가 자주 편치 않았고
약시중을 받는 일로 피로가 쌓여 종기가 날로 심하였다”는 기록을 들어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한여름에 문을 꼭꼭 닫아 걸고 뜨거운 탕약을 수 없이 마셨으며,
수은 치료까지 받는 중에 거의 20일 동안 미음으로 연명한 것이
결국 더위와 탈진, 영양실조를 불렀을 것으로 보았다.
의학 서적 저술
정조는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수민묘전》이라는 의학서적을 정리한 임금이다.
《홍재전서》라는 개인문집을 남길 정도로 지적 수준이 넓고 다 방면에 학문적 식견도 높았다.
정치
붕당정치와 탕평책
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재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강화 정책이었다.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처하였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하였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峻論蕩平)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名節)과 의리(義理)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세력의 참여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결국 관료, 산림,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군사부론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임금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인 군사부론을 생각했다.
그에 따라 즉위 후에도 경연을 열 때
경연관들과 재상들, 승지들의 학문 실력을 점검하고
정조 스스로 바로잡아주거나 사서육경 해석에 대한 의견을 놓고 학자, 경연관들과 논쟁하기도 했다.
세자 시절의 사부였던 김종수는 정조에게 통치자이자 임금이자 아버지가 될 것을 누누히 강조했고,
이는 세자 당시 그가 평소 생각하던 생각과도 일치했다.
김종수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김종수는 소론 벽파의 주도로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자를 공격할 때,
홍국영 등 소수의 소론 당내 인사들과 함께 세자 보호에 앞장섰고 정조는 김종수를 신뢰하였다.
또한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정치의 근본을 의리로 규정한 정조는 김종수를 각별히 아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노론의 청명당파벌은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다.
김종수는 특히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
오로지 군주의 안위를 생각하여, 친지라 해도 문제가 있는 자는 고변하여 제거하겠다는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
이러한 김종수의 소신은 노론 당내에서도 엄청난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통편 간행 사업
대전통편 서문
《대전통편》은 1785년(정조 9년)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대전통편의 편찬에 관심을 기울이고 직접 편찬 사업에 관여, 보고를 받았다.
대전통편은 모두 723조로서,
그 가운데 이전이 2112조, 호전이 73조, 예전이 101조, 병전이 265조, 형전이 60조, 공전이 12조 등이다.
조선의 법제는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1492년)이나 《경국대전주해》(1555년)와 같이
해석이 어려운 조항에 주를 달거나 판례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정비되어 오다가,
영조 대인 1746년에 이르러 경국대전 가운데 영구히 지킬것을 가려 《속대전》을 만들었다.
《속대전》에는 탕평책 추진으로 인한 권력구조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을 만들면서 각각의 조항에 대해
《경국대전》의 것은 원(原), 《속대전》의 것은 속(續), 그 이후에 재정한 조항은 증(增)으로 표시하는 한편,
폐지한 조문도 그대로 실으면서 그 아래에 금폐(今廢)라 표기하였다.
《대전통편》은 새롭게 도입한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가 한층 강화된 법령이었다.
《대전통편》 은 이후 고종 2년(1865년) 《대전회통》이 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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