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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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통공
채제공은 1778년(정조2년),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겸 진주사로 베이징에 다녀온 후
평소 자신이 주장하던 이용후생의 경제학을 다시 확인하였다.
함께 다녀온 박제가가 《북학의》를 펴며 조선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한 것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경제의 활성화가 중요하다고 본 점은 같았다.
채제공은 육의전이 금난전권을 함부로 사용하여 물산을 독점하고 물가를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해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신해통공 조치를 통해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철시를 하며 반발하는 한편 입궐하는 채제공을 가로막고 반대하였으나
채제공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조는 당시 발달한 민간상업에 힘입어 시전상인의 반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세수를 마련하여 국가재정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해통공을 통하여 이득을 본 것은 영세상인이 아닌 사상도고와 같은 독점적 도매업자였다.
신해통공이 육의전만을 규제할 뿐 사상도고를 규제할 방안은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정조는 재위기간 중 신해통공을 계속 유지하였으나 물가의 상승을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정조 사후 사상도고의 독점에 따른 폐단은 1833년 쌀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서한 정치
정조는 조정의 중신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어 막후에서 정치를 조정하였다.
정조가 보낸 편지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채제공, 조심태, 홍낙임, 심환지 등에게 보낸 것이 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 문제를 논의하고,
상소로 제기된 민감한 현안이나 인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가하면,
자신의 건강 상태, 신하의 대소사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정조의 편지는 대부분 직접 쓴 것으로 봉인하여 비밀리에 보냈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 지목하며 문체반정을 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편지글에서 비속어, 속담, 욕설, 이두 등을 가감없이 사용하였다.
토목 사업, 수원 화령전에 있는 정조 어진 화성 행궁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새롭게 성을 축조하였다.
1789년(정조13년) 10월 묘를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고 인근에 화성(華城)을 축조하였다.
1792년(정조16년) 초여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참고할 자료로 청나라 강희제 때 편찬한 백과사전인 《도서집성》과
독일 출신의 선교사 Johann Terrenz가 지은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의 이용을 설명한 《기기도설》을 전달하였다.
화성은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되었는데,
성의 둘레는 5744 m,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 형태의 성으로
문루 4개, 수문 2개, 공심돈 3개, 장대 2개, 노대 2개, 포(鋪)루 5개, 포(砲)루 5개, 각루 4개,
암문 5개, 봉돈 1개, 적대 4개, 치성 9개, 은구 2개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하나의 성곽을 이루었다.
수원화성의 공사책임자는 채제공이었다.
공사 도중 가뭄으로 한 때 공사를 중지하기도 하였으나 2년7개월만에 완공을 하였다.
축조에 동원된 인부에게는 급여를 지급하였고, 공사에 사용된 자재, 인건비 등을 모두 기록하여 남겼다.
정조는 화성 축조의 모든 기록을 정리하여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였다.
훗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화성이 크게 훼손 된 뒤
1975년 화성복원공사를 할 때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화성은 기존의 성곽과 달리 규격을 정한 석재를 사용하여
중국 성곽의 장점을 수용하고 화포 등 새로운 무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이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는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미장이 295명을 합해 총 11820명에 달한다.
공사경비로는 돈 873520냥과 곡식 13300석이 들었는데
경비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정번군을 10년 동안 정지한 재원과 경기감영의 예비비로 충당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사용하여 돈 4만냥을 아낄 수 있었다고 칭찬하였다.
정조는 화성에 유수부(留守府)를 두고 행궁과 군영을 설치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였다.
화성에 주둔한 장용영은 기존의 중앙군영이 노론세력에게 장악 당한 것과 달리 국왕이 직접 관리할 수 있었다.
이는 화성의 축조가 단순히 아버지를 추숭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는 화성안에 노래당과 미로한정을 지어 자신의 뜻을 비추었는데,
세자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어머니 현경왕후와 화성으로 여생을 보내려 하였으나 1800년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수원화성까지 능행에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새롭게 길을 닦았는데 이 길이 시흥대로의 시초이다.
새로 닦은 신작로(新作路)의 폭은 약 24尺으로 오늘날의 도량형으로는 10m 정도 된다.
한편, 조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릉은 한양 4대문에서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88리 떨어진 현재의 수원으로 이장하려 하자,
대신들은 이장지가 한양 4대문에서 88리 떨어진 곳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외교, 대청외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에 대한 사대외교를 하였다.
스스로를 중국의 번국 지위에 놓는 사대외교를 하면서
조선은 겉으로 신하를 자청하였으나 안으로는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국이라는 생각이 강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뒤,
조선에서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명과 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대명의리(對明義理)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앞섰다.
대명의리는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기도 하였다.
병자호란과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대해 명대와 같은 사대를 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조선 효종은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수모를 갑기 위해 북벌(北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정조시기에도
양반층에서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의 연호를 사용하며 스스로를 중화로 여기고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았다.
대표적으로 명나라 시기 베이징을 다녀온 기행문의 제목이 《조천록》(朝天錄)이었던 것에 반해
삼전도의 치욕 이후 《연행록》(燕行錄)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조천록은 하나 뿐인 황제국의 수도를 다녀온 기록이란 의미이고,
연행록은 세상의 수 많은 나라의 서울 가운대 하나인 연경을 다녀온 기록이란 의미가 된다.
정조시기에 이르러 청나라를 바라보는 시각 가운에는 문물이 번창한 선진국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북학파 실학자들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서문에서 숭정후삼경자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명나라가 망한지 130년이 지나서도 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학파의 주장은 새로운 문물의 도입과 같은 일에 일부 수용되었을 뿐으로
당시를 주도한 중화의식은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로 보았다.
조선중화의식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였다.
현실에서 조선 후기의 대청외교는 갈수록 예속의 정도가 심하게 되었고,
정조 시기 교제를 지내자거나 황제를 칭하고 독립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상소가 한두번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정신나간 소리 정도로 치부하였다.
조선은 동지사를 비롯한 각 종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냈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에 보고하였으며,
청나라 역시 명나라에 비해 더 많은 간섭을 하였다.
한편, 대청외교는 무역통로로서도 중요하였는데,
조선은 공식적으로 개인간의 무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신행렬과 함께 동행하는 공무역인 개시(開市)에는 역관의 개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역관 중에는 거대한 부를 쌓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영조, 정조 시대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무역인 후시(後市)무역이 개시무역보다 규모가 커졌다.
무역상인들은 교역품의 시세차익으로 이익을 얻었는데 품목에 따라 10 - 20배에 이르는 차액을 남기기도 하였다.
대일외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여 통신사를 파견해 오고 있었으나, 매우 경계하였다.
일본 역시 18세기 후반에 들어 대기근과 폭동이 일어나는 등 내정이 어지러웠고 막부의 재정이 어려워져
오랫동안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정조 시기에는 한차례도 통신사 왕래가 없었고,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된 것은 1811년(순조11년)의 일이다.
일본은 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통신사를 청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조선의 통신사가 자신들을 조선보다 한 단계 아래로 보고 대등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들어가 대열 앞에 청도(淸道), 순시(巡視), 영(令)이 쓰인 깃발을 들었는데,
일본의 성리학자 나카이 지쿠잔(中井 竹山)은
막부의 섭정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게 청도는 길을 치우라는 뜻이고,
순시는 국내를 돌아보는 것이며 이를 명령한다는 뜻의 깃발을 앞세우니 국가의 치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정조 시기 일본과의 외교는 동래와 쓰시마로 한정되었다.
서양과의 만남
조선 초기에도 서양의 존재는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부정확하나마 중국의 서쪽에 인도, 아프리카, 유럽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베이징에 천주교회를 세우고,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한 《천주실의》를 발간하면서
서양의 여러 문물과 종교, 문화가 알려지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여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왔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숙종 시기 조선에 전해져 필사본이 제작되었다.
청나라 시기 서양의 역법을 참조하여 기존의 역법을 수정한 시헌력이 제정되었으며,
조선에서도 1653년(효종 4년)부터 사용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문물의 출현은 당대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영조 시기 기술자 최천약은 천문기기를 제작하고 자명종의 부품을 만들어 수리하였다.
정조 역시 이러한 서양문물을 많이 접하였는데, 40세 이후 시력이 나빠지자 안경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문물을 수용한 것과 달리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는 엄격히 탄압하였는데,
정조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보아 배척하였다.
이는 노론의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권상연과 윤지충을 사형하면서 천주교를 적극 반대하던 노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1795년(정조19년)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한 사건이 적발되면서
정약용이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은 수세에 몰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 남인은 중앙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문화
정조는 스스로도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김홍도에게 《주부자시의도》를 그리도록 하고,
송시열의 자찬이 담긴 《송시열 초상화》에 감상평을 적는 등 문화 활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화원들의 그림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스스로 도화서의 운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783년(정조7년) 도화서의 화원 가운데 자비대령화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파견하여
왕실의 주요 화사(畵事)를 담당하게 하였다.
정조는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제를 운영하면서
각 화원들의 장단점을 일일이 품평할 만큼 세심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하였는데
각종 의궤와 군사의 훈련을 다룬 《무예도보통지》,
송시열의 문집을 정리한 《송자대전》,
정조 스스로의 글을 정리한 《홍재전서》와 같은 것들이 있다.
또한 이순신의 문집을 정리하여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특히 이순신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재위 후반, 최후
1800년(정조24) 음력6월초 정조는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얼굴과 등으로 번졌고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煙熏方)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은 정조는 음력6월28일 유시(양력8월18일 오후 5시~7시)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죽자 어의 강명길은 죽임을 당한다.
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 (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大喪)이 났다.
사후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 하였는데,
본래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융릉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1년에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영돈녕부사 박수종은 현재의 건릉 자리가 흉지이므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해야 한다고 순조에게 건의했고,
건릉은 현재의 자리로 천장되어 (경기도 화성시)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바로 정종(正宗)의 묘호를 추서하고, 뒤에 고종 때 가서 정조로 격상되었다.
묘호인 정종(正宗)의 의미는 올바름으로 모든 사람을 감복(복종)시켰다는 의미이다.
독살설
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을 주선한 심환지와 이시수가 노론의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독살설을 부추겼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파다하였다.
정약용은 솔피시를 지어 이러한 독살설을 은유적으로 암시했다.
그 해 8월18일 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
정약용은 여성 유배인이 현지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을 개탄한
〈고금도장씨녀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를 적으면서
심환지가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를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남겼다.
가족 관계
조선 제22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정조 선황제 正祖 宣皇帝
출생 1752년10월28일(음력9월22일) 사망 1800년8월18일(음력6월28일) (47세)
일화, 골초
단순한 골초가 아니라 정조는 아예 “조선을 흡연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할 정도였다.
담배를 매우 즐긴 인물이었던 정치가요 문장가인 장유는
“지금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
굶주림을 배부르게 하고 배부름을 주리게도 하며 추위를 따뜻하게 하고 더위를 시원하게 한다고 말한다.
지금 남초(南草)를 피운 지 수십년이 되었는데도 이와 같이 펴져 나갔으니
100년 뒤에는 반드시 차와 이익을 다툴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정조 임금이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힐 때도 금연운동가는 있었다.
의빈 성씨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성덕임)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집 청지기의 딸이었다.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가 나랏돈 7천냥을 횡령하자
성덕임을 가엾게 여긴 혜경궁 홍씨가 1762년 자신의 처소의 궁녀로 삼고 양녀처럼 길렀다.
성덕임은 정조의 누이인 청선공주, 청연공주와 1773년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정조는 1766년 15세 때 당시 14세였던 성덕임에게 승은을 내렸고
성덕임은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을 염려하며 울면서 거절했다.
15년 후 다시 30세의 정조가 재차 승은을 내리자 다시 성덕임은 거절하였다.
그 후 정조는 성덕임의 시속을 벌 주었고, 결국 그녀는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조는 의빈 성씨 사후 《어제의빈묘지명》,《어제의빈치제문》등을 작성하였고
'사랑한다'라는 표현도 거듭 사용되었다.
그는 후궁과 자식을 나란히 묻을 수 없는 관례를 깨고
아들 문효세자의 묘에서 100보 떨어진 자리에 묘를 만들었으며
왕을 낳은 후궁을 모신 칠궁에도 의빈을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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