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청 보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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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청 보라매
naver blog 기러기 2019.11.29.23:16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고대국가 시절부터 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잡는 매사냥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특히 백제의 매사냥 기술은 일본까지 전파되어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까지는 매사냥이 귀족층의 고급 레저문화로 유행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 매사냥을 선호했는데 조선실록에도 매사냥에 대한 기록이 600회 이상 나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여러 임금 중에서 세종대왕이 유별난 매사냥 마니아였다고 합니다.
관련기록이 160회나 되어 단연 선두라고 하는군요.
학구적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의 또 다른 일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사냥꾼을 매 응자를 써서 응사(鷹師)라고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그 명맥을 잇는 사람이 단 두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민족과 매사냥은 큰 관계가 없고 몽골 등 북쪽지방이 매사냥의 종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매사냥의 본류는 우리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매는 그 종자가 탁월했는데
순간 비행속도가 아주 빠르고(시속 300KM 이상될 것으로 추정) 사냥감에 대한 공격 정확도도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방계열의 이민족들은 우리나라의 푸른빛 도는 사냥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 부르며 선망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해동청을 참매 혹은 송골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라매는 태어난지 1년이 안되는 햇매를 야생에서 거두어와 사냥법을 훈련시킨 용감하고 씩씩한 매를 지칭합니다.
우리 공군의 상징이 보라매가 된 기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추정컨대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이 작사한 공군의 전통군가 ‘은익의 노래’에
“해동청 보라매가 바람을 탄다”는 구절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6.25전쟁때 공군에 소속된 문인단인 창공구락부에서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조지훈 선생의 식견과 혜안에서
대한민국공군의 상징이자 별칭이 된 보라매가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을 개연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
매사냥이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때,
과연 조지훈 선생과 공군이 아니었다면 해동청이니 보라매니 이런 어휘들이 지금 살아있을까 싶습니다만
우리의 언어 속에는 의외로 사냥매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옹고집’은 어원이 응(鷹)고집입니다.
사람 말을 안들을 때는 하염없이 고집을 부리는 매의 특성을 빗댄 표현이지요.
또 ‘매섭다’, ‘매몰차다’, 매처럼 날카롭게 노려본다는 ‘응시(鷹視)’,
사냥매가 먹잇감을 놓치고 하늘에서 빈 바람을 맞으며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서 나온 ‘바람맞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대표적 표현은 ‘시치미’지요.
“저 사람 시치미 뚝 떼네” 할 때 시치미는 원래 사냥매의 꼬리날개 중앙에 달아주는 인식표였습니다.
쇠뿔을 삶은 다음 딱딱한 겉껍데기를 직사각형으로 자르고 나서
그 위에 주인과 매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고니의 흰 깃털과 소리가 멀리 퍼지는 인청동 방울을 묶어서 만듭니다.
일종의 ID카드로 보아야 하는데
방울을 다는 것은 숲속에서 사냥에 성공한 매의 위치를 신속히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시치미가 있었다는 것과
시치미를 떼어 남의 매를 자신의 매로 둔갑시키는 사례에서 비롯된 관용어구가 일상 언어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과거 우리의 선조들에게 매사육과 매사냥이 매우 보편화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해동청 보라매의 명성 때문에
몽골 간섭기의 고려는 응방(鷹坊)을 만들어 사냥매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원나라로 보내는 관청까지 두었었고
조선도 해동청을 보내라는 명나라의 조공 요구를 맞추느라
함경도와 평안도에 장수를 파견하여 매를 포획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아시아 대륙 전역에 매사냥의 인기가 높았고
우리나라 사냥매를 총칭하는 해동청이 최고의 기량을 갖춘 사냥매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치미도 각 지역의 기후나 문화에 따라 달라진 형태로 남아있는데
매의 꼬리에 소유자의 성명을 정확히 표기한 시치미를 달았던 우리의 문화와는 달리
몽골 카자흐족은 검독수리를 이용한 사냥을 하는데 양다리에 긴 가죽끈을 묶어 훈련된 사냥매임을 표시합니다.
이들은 약 8년 정도 함께 사냥을 하면
그간의 노고에 감사함을 담아 다리에 달았던 가죽끈을 떼고 흰색 천을 달아서
알타이산맥 하늘 위로 날려 보내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흰색 천을 단 검독수리는 이미 인간을 위해 봉사한 새이니
누구도 다시 잡아들이거나 해치지 말 것을 알리는 그들만의 징표라고 합니다.
수년 전 방송되었던 다큐멘터리에서
검독수리의 여우사냥에 의존해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온 주인이
정들었던 검독수리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며 자신의 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는 이번 호 화풍지설을 마지막으로 쓰고 정들었던 공군의 둥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월간공군과의 인연도 꽤 깊었던 듯합니다.
80년대 후반, 중위 시절 2년여 정도 공군지 편집장교로 일했었고
소령 때인 1998년도에는 계간지였던 공군지를 월간지로 개편하는 작업을 주무하며
공군지가 지금의 편집 스타일로 변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어느 기관지도 공군지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잡지는 없습니다.
6.25전쟁 중에도 선배들은 공군지를 계속 발행하여 전쟁을 기록했고
창군 선배들의 정신과 문화를 후배들에게 남기고자 노력했습니다.
저도 이 잡지의 편집인으로써 공군지 독자가 현재 군생활을 하는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30년, 50년, 100년 뒤의 후배들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공군지를 만들었습니다.
먼 훗날 후배들은 반드시 공군지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우리가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 가야 할
대한민국공군의 정신과 철학을 공군지 안에서 끊임없이 발견하고 재해석하며
우리 공군을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6년간 공군 유니폼을 입으며 자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소년의 몸으로 공군에 들어와 이제 장년의 몸으로 공군을 떠나게 된 지금,
공군에 들어올 때 기뻤던 것처럼 설레고 뿌듯한 마음입니다.
주어진 임무들을 동료 선후배들 덕분에 잘 마치고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영공수호의 일익을 담당하며 스스로를 성장시켰고 가족들도 잘 돌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 공군이 제게 베풀어준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간 화풍지설에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공군과 함께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갈 공군지에 변함없는 애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저는 시치미를 뗀 해동청처럼,
다리에 흰색 천을 묶은 검독수리처럼 저의 본향(本鄕)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공군에 첫발을 내밀며 부푼 가슴으로 바라보았던 36년 전의 하늘처럼 오늘도 저 하늘은 변함없이 아름답군요.
대한민국공군이 해동청 보라매처럼 높이 비상하여 조국 수호의 선봉장이 되어주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간공군 2019년12월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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