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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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해군 창설 손원일 제독 : 나무위키에서 발췌
1. 개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할 무렵#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사업가로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2. 생애
1909년6월22일 평안남도 증산군 국보면 오흥리(현 증산군 낙생리)에서
감리회 목사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손정도와 어머니 박신일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상선사관 시절
중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열강들의 조계가 여럿 설치되어 있던 상하이에서
이들 조계를 보호하고 친선방문 등의 목적으로 들어와 있던 각국 해군들을 보고 감명받아,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 해군은 특정 지역 군벌이 장악하고 있어
타지인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은 뒤, 대신 상선사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1924년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 졸업 후 항해사로 임관했다.
이후 1927년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 3년간 유학하며,
1930년대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재의 아메리카 라인사에서 상선 항해사로 근무했는데,
이때 하벤슈타인호에 6개월간 2등 항해사로 근무하면서
함부르크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장거리 항해를 처음 경험하였으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1만5천톤급 대형 원양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으로
해운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6]
공식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때의 이력이 해군 창설기에 사람들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이라 추정된다.
2.2. 독립운동 및 개인사업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격)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면서 고문하던 도중에 손원일의 이름이 나왔고,
그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인 것을 안 일제가
당시 휴가를 내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손원일을 체포 및 고문했다.
이 부분은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렇다고 손원일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원일은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
석방 후 고문 후유증[7]을 치유하던 와중, 지인의 제안으로 식료품 수입상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위해선 수시로 만주국과 조선을 오가야 했는데,
석방 후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해외 출국이 금지된 탓에 이를 할 수 없었으나,
그 지인이 일본 경찰에 손을 써서 요시찰 대상에서 제외됐고, 곧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손원일 개인의 수완과 전시로 인해 급상승하던 식료품 가격 등에 힘입어 크게 성공했고,
이때 모아둔 재산이 훗날 조선해안경비대 창설 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2.3.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8월21일, 해방병단 모집을 위해 서울에 붙인 벽보#
중국유학, 독일 상선사관으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강대국의 해군력을 두눈으로 실감한 손원일은,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11월11일[8]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이후 해방병단(海防兵團)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 시절에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구 일본군이 쓰다가 버린 소형 목선 몇척이 전부였을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을 수리하고 미 해군에게서 소해정을 인수하는 등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창군 당시 손원일 제독의 군함 도입 일화.
그후 1948년9월5일에 조선해안경비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손원일 대령은 그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9]이 되었다.
1948년12월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2개월 후인 1949년2월4일 손원일 준장은 이응준·채병덕·김홍일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기도 했다.
여순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당시 해군장교였던 신현준 소령이 해군본부에
"우리도 해군 육전대 같은 상륙부대가 있었으면
바다를 통해 진압병력을 빠르게 기동시켜서 일이 커지기 전인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를 설득력 있다고 판단한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창설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고 건의한 인물인 신현준 장군은
해군본부의 창설 허가가 나자 해병대 창설을 직접 맡아서 주도했고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되어 중장으로 예편했다.
위에 소개된 링크글에도 나오듯이,
손 제독은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도입할 당시에도 직접 나서서 성사시킨 바 있다.
그리고 백두산함은 6.25 발발 당시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또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 최고사령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제독으로 미국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 일색이었던 해병대나 육군의 지휘관들과는 달리,
해군의 참모총장들은 일본군 출신이 없다.
손원일 제독이 일본군 출신을 배제하려 해서는 아니고,[10]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해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출신들을 받아들인 육군과 다르게[11]
불신과 자부심등으로 조선인들을 끝까지 징병하지 않았고
당연히 해군병학교 및 승선 직별 대상자에서도 제외됐으며
자진 지원자들에 한해서 조차도 육상근무만 겨우 시켰기에[12]
일본해군 출신 병과[13]사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해군본부에서 발간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는
창설 멤버 중 해군병학교 출신 병과 중좌가 한명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 내지인 신분을 획득해 입학한 특이 케이스다.
대신 이들은 만주군 육군 출신들과 함께 신규 창설한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그래서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이 모두 만주군 육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해병대 내무생활 문화에 일본군 잔재가 짙게 남게 되고
해군을 이끄는 항해장교단은 한동안 상선사관 출신 제독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일부에서 '일본군 출신이 없는 해군만이 정통성이 있고,
나머지 군종은 친일 후예'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는 손원일 제독 본인을 포함한 창설 당시
해군 수뇌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충원할 수 있었던 인력의 구성을 반영한 결과론일 뿐이다.[14]
게다가 손원일은 건군 및 6.25전쟁 초기에 육군과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김정렬(둘다 일본군 출신)과
'육해공 삼형제'라고 부르며 평생 의형제 관계를 유지했다.[15]
이런 점을 보면 '해군 빼고는 친일파 후예'라는 작금의 주장은 손 제독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손 제독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점이 해군에게 있어 상당한 메리트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2.4. 6.25전쟁기 활약상
2.4.1. 개전 당시
개전 당시에는 해군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가 있었다.
개전 소식이 들리자 귀국을 서둘렀으나,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인수 중인 함정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해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2.4.2. 인천상륙작전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한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해군의 이희정 중령 및 함명수 소령[16]에게 지시,
이를 성공시켜 인천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17]
상륙작전 당시에는 함대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 장성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령관이 전장에서 직접 돌격한 사례는
같은 6.25전쟁 당시의 육군 백선엽 장군의 사례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애시당초 미군 위주의 연합군이 주도하던 인천상륙작전의 개시 직전에
한국 해군과 해병대도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제독이 이 역사적인 작전에 한국군도 꼭 참여시켜야 한다고 연합군측에 적극적으로 주장한 공이 컸다.
2.5. 전쟁 이후
1952년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 후 이듬해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1958년 초대 주서독 대사를 지냈다.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전투함이 한척도 없는 해군에서 대장이 나온다면 그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갖춰지거든 그 이후에 대장 계급을 받겠다고 본인이 고사했다.[18]
대한민국 해군에서 최초의 대장은 1966년에 취임한 8대 김영관 참모총장이다.[19]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하나.[20]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겨우 일본 해군에서 목선 몇척 인계받은 아무 것도 없는 한국 해군을 일으켜 세웠고
장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21]
1980년, 신장병으로 투병 중에 끝내 사망하였는데, 이때 아내와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한다.
그들은 모두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썼고,
오늘날의 해군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22]"
투병 시기에 국방부에서 군의관 1명을 주치의로 전담시켰는데,
처음엔 육군 군의관이 왔으나 얼마 뒤 손 제독의 희망에 따라 해군 군의관으로 교체되었다.
개인적으론 처음부터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었으나
배정된 육군 군의관이 자신을 못 믿냐며 섭섭해 할까 우려해 한동안 얘길 못 했는데,
자신은 해군 출신이니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다는 뜻을 그 육군 군의관에게 전하자
군의관이 바로 이해해줬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북한의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손 목사가 중국 길림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할 때 김일성은 그의 교회에 다녔고
손 목사의 도움으로 손원일이 다니던 중국 길림의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김일성의 집안은 대대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은 강반석인데,
이 반석은 12사도 중 1명인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기반, 반석이기 때문.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손정도의 숭실학교 2년 선배였다.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이 투옥을 할 때 옥바라지를 해 줄 정도로 상당히 아꼈고,
김일성도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에 대해 친아버지와 동급으로 생각했다.
또한 손 목사의 차남이자 손원일의 동생인 손원태 박사와는 육문중학교 동급생으로 의형제처럼 지냈다.[23]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994년8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 차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이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으로
6.25 전쟁 당시 김일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심지어 손원일 제독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손원태 박사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있다.#
부인인 홍은혜는 음악교사 출신으로 독실한 개신교(감리회) 신자로서
개신교 관련 증언이나 서적에 자주 나온다.
회고록도 절반 정도는 개신교 관련 이야기다.
2017년4월19일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음악교사라는 전공을 살려서 최초의 한국해군 군가 <해방행진곡>과 <바다로 가자> 등 을 작곡하였다.
<해방행진곡>, <바다로 가자> 는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 이다.
장남 손명원은 기업인으로 살았고[24], 차남 손동원(건축사), 3남 손창원(사업가)이 있다.
누나 손진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이자 윤치영의 사촌동생인 윤치창과 결혼했다.
장남 손명원의 차녀인 손정희는 전 국회의원 홍정욱과 결혼했다.
즉, 홍정욱은 손원일의 손녀사위가 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은 그의 7촌 조카로,
손원일의 조부 손몽룡(孫夢龍)[25]과 손기정의 증조부 손종일(孫鍾一)은 친형제였다.
4. 민간인 학살 혐의 논란
반헌법행위자열전, 반헌법행위자열전 수록 집중검토대상자 405명 사건별 명단이라는 것의
학살자 명단에도 '손원일' 이란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손원일 제독이 학살을 지시했거나 묵인하고 행위를 간접으로 지속시켰다는 내용은 보고서에 없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학살명령은 아니어도 명령계통상의 학살 책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고
그외에 이런 저런 증언에서도 학살론을 긍정하는 기사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 나주투데이 기사
모든 것이 정리된 후의 사건 요약글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명령 아래, 포항 지역에서 좌익분자로 의심되는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였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어느정도 변호를 해주자면,
이런식으로 따지면 6.25전쟁 당시 한국군 장성 중에서 민간인 학살 혐의에 조금이라도 관여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없다.
애초에 6.25전쟁 자체가 좌우익 막론하고 엄청난 학살이 벌어졌던 전쟁이었으니...
5. 손원일급 잠수함
[1] '손원일' 이라는 이름을 로마자로 올바로 표기하면 'Sohn Won-yil' 또는 'Sohn Wonyil' 로
본인이 생전에 그렇게 썼으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유품 등으로 확인할 수 있고 해군 내에서도 그렇게 써 왔다.
하지만 손원일함의 영문 표기는 표준 로마자 표기법을 적용하여 'ROKS Son Wonil' 이라 썼는데,
정작 국립국어원에서는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다' 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2] 이북5도 기준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
[3] 진주사공(휘 상겸)파 45세.
[4] 남양 홍씨 홍두수(洪斗洙)의 딸이다.
[5] 창설 당시엔 총참모장이었다.
[6] 25만톤에 달하는 현대 유조선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배처럼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호화여객선으로 건조되었다가 개조되어 항공모함이 된
히요, 준요가 배수량 2만4천톤급에 전장은 200m를 넘었다.
이 둘은 미군에서도 경항모가 아니라 정규항모급(함대형항모지만)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큰 배이다.
[7] 고문으로 인해 공황장애에 평생 시달렸다.
[8] "해군은 신사(士)다."라는 뜻에서 11월11일11시에 해방병단 결단식 거행
[9] 당시에는 해군총참모장.
[10] 손제독은 해병대 창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해병대도 해군과 다름없이 자식처럼 여겼다.
[11] 조선인 같은 경우 1939년 후반까지 가서야 일본육군에 처음 지원이 가능해졌다.
(그에 반해 모든 일본인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역의 의무를 부여받았다.)
[12] 따라서 '일제강점기때 해군으로 끌려가 배타고 싸웠다'는 주장을 하면,
그 신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13] 일본해군에서 병과란 항해, 포술, 수뢰, 항공 등을 맡는 전투병과의 일종으로,
일본해군에는 전투병과란 병과 단 하나뿐이었다.
항공과가 따로 있었으나, 이는 사병 출신 사관인 특무사관들 중 항공계열인 이들에게만 붙었다.
해군에서 기관과, 군의과, 법무과, 기술과, 주계과 등 병과가 아닌 사관들은 비병과사관이라는 용어를 썼다.
[14] 공군의 경우만 봐도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2대 참모총장이자 앞서 초대 국방차관이었던 최용덕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김신(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아들)을 비롯한 다른 광복군 출신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미공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미공군 색깔이 강하다.
게다가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시정부의 국방장관격인 노백린이 공군력 건설에 착수한 바 있다.
[15] 출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편찬한 손원일 제독 평전.
[16] 북한간첩에 의해 미군 배가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해군특공대를 임시로 조직해 옹진만을 급습한 주역이다.
이후 제7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군예편 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7] 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작전에 직접 참가하여 교전을 벌인 해군특공대 병력은
북한군과의 총격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
[18] 현실적으로도 당시 한국해군을 지휘하던 미극동해군사령관의 계급이 중장이었는데
손 제독이 대장직을 수락하게 되면 미군과 지휘체계 문제도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이지만 작전권이 없고,
작전권은 중장 계급인 대한민국의 해군작전사령관이 행사하므로 미7함대와 연계시 큰 문제는 없다.
미7함대사령관도 중장이지만, 미군에도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계급이 같은 부대는 널렸고,
당장 한미연합군사령부도 사령관은 미군대장이, 부사령관은 한국군대장이 역임한다.
[19] 해사1기 동기생들인 이맹기(6대), 함명수(7대) 모두 중장으로 참모총장직을 수행했고
역시 해사1기 동기생인 9대 참모총장 장지수도 대장이었다.
해사1기 동기생인 공정식은 해병대로 전군하여 해병대사령관이 됐다.
1963년 충무함을 도입해 구축함을 가지게 되면서 해군에서 대장 계급이 나올 수 있는 명분이 갖춰진 점도 있다.
[20] 그래서 이순신, 장보고, 손원일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붙은 함급이 존재한다.
[21]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한국사에서 해양력의 가치를 처음 실증해냈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지상에서의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 바다에서의 승리를 통해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결국 멸망 직전에 봉착했던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자 항일독립투쟁에 동참한 인물로서
신생 해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한 공로가 크다.
아울러 이 세 인물들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함대를 키우고 병력을 양성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순신은 초창기에 빠르게 승진한 것 외에는
선조에게 지원을 못 받아서 둔전과 어업으로 자금을 모아 함대를 꾸렸고,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게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무역으로 스스로 자금을 충당했으며,
손원일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의지는 확실했지만
막 정부수립이 이루어져 더욱 지원받을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군을 건설했다.
[22] 이 구절은 2018년 서해수호의 날 영상 "헌신"의 주제로 쓰이기도 했다.
[23] 참고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극우반공주의였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당했다.
따라서 김일성은 자기 은인에게 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도 손 잡은 것이다.
[24] 1941년생. 서울고등학교(11회)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대학을 마쳤으며
1980년 현대그룹에 입사하여 현대중공업 전무와 부사장, 현대미포조선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차녀 김영숙과 결혼하였으며 아랫동서가 정몽준이다.
[25] 족보명 손형준(孫亨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