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해전
페이지 정보
관련링크
본문
부산포해전
나무위키: 2023-04-06 11:31:07
1. 개요
임진왜란 초기 1592년(선조25년) 임진년9월1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당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전진기지가 타격을 받아 전선 130척이 침몰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본영이자 전진기지인 부산포 조차도
언제든지 조선수군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 공포에 벌벌 떨게되었다.
이 해전에서 전라좌수영 최고의 돌격장 녹도만호 정운이 왜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게
이 해전 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매우 만족해하며 임진년의 대첩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해전이었다.
2. 배경
2.1. 꽁꽁 문을 걸어잠근 일본군
일본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이는 한산대첩의 패배로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의 주력 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일본군 8천여명이
함선 470여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 도주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
3. 전개
3.1. 이순신의 출전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8월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합계 166척의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출전했다.
이순신은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에 있는 천성진성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하구를 거쳐 9월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기습을 시도한 적선 34척을 모두 격파하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3.2. 쑥대밭이 된 부산포
부산포 앞 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군의 전선 4백여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일본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수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수군에 압도된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아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의 전선들을 향해 각종 총통을 사용해 집중적으로 포격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적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거듭된 패전으로 일본군이 조선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나 한산도대첩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그리고 노획 및 보급 등으로 확보한 각종 화포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소규모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맞닥뜨릴 때마다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또한 방어 목적만 두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육상에서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여 해상의 적 선박에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강력한 해상 거부 전략이었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부산성을 목전에 뒀지만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부산성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단병 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수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
부산까지 항해하는 바람에 병사들도 많이 지친데다,
지금까지 조선수군이 화력에서 우세했기에 이겼던 것이지 병력에서 우세했던 것은 아니며
일본군과 달리 말이 없었기에 육전을 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의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인, 부상자 25인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수군을 해진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
수치로만 보면 적군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수준의 대승이었지만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한 타격이 컸는데,
전라좌수군이 지휘관급 인물을 잃은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특히나 정운은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조선수군 제일의 맹장으로 늘 돌격대장을 맡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웅포해전 당시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활약으로 상륙해 웅포를 점령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4. 의의
이순신이 지금껏 해왔던 승전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했던 승전으로써
스스로에게 제일 엄격했던 이순신이 이 정도로 만족하며 장계를 올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임은 두 말할 것 없으므로 대첩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과함이 없다.
다음은 이순신이 쓴 승전 장계이다.
전후 네차례 열번의 접전에서 번번히 승전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해전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야 70여척을 넘지 못했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척의 전선이 늘어선 가운데에서도
(우리 수군이)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여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게 하여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비록 수급을 취하진 못하였으나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 전투에서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부산포 파왜병장
이 단 한번의 해전으로 하삼도의 일본군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후 1597년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궤멸되기 전까지
일본군은 그 어떤 곳에서도 단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평양까지 승승장구하며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보급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이 전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가히 조선군의 대반격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부산은 임란이 터진 직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부산이 조선 침략에 있어서 중요한 요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군의 본진이기 때문에 조선수군이 쉽사리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부산포해전은 적의 본진을 바다에서 타격한 전투였고,
이로 인해 본진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는데 이것은 엄청난 전과이다.
본진이 적에게 위협받는데 함부로 많은 병력을 출정 시킬수도 없거니와
본진을 구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전범위도 좁혀질 것이며
이미 출정한 병력들 또한 마음껏 싸울 수 있을리가 없다.
따라서 최근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끝낸 결정적인 전투를 이 부산포해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기려,
1592년음력9월1일을 양력10월5일로 환산하여 부산시는 10월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5. 후대의 인용
체스터 니미츠 해군원수가 원수계급이 부여되기 2달 전인 1944년10월9일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무패 선전을 언론. 최소 10월10일 뉴욕 타임스에 올려지는 인터뷰에서
정황상 이 해전을 언급하며,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뉴욕타임즈 아카이브. 볼려면 로그인을 해야한다.
6. 대중매체에서
마침내, 임진년9월1일오후2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부산 일본군 본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부산해전에서 이순신이 선택한 진형은 장사돌진(長蛇突陣)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 유리한 위치에 화포를 설치하여 일제 포격을 감행했다.
곡사화기는 지대가 높아질수록 그 사거리가 길어진다는 특성으로 볼 때,
부산해전은 이순신의 함대에겐 결코 유리한 싸움이라 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장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육지로부터 가해질 화포 공격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진형이 바로 장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만에 이르는 적이 육지로부터 집중포화를 쏟아부었으므로, 이 진형조차도 안전할 수 없었다.
임진년 9월1일 부산포해전.
이 해전은 옥포, 당포, 한산으로 이어지는 제해권을 장악했던 이순신이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을 공격함으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이 모두 조선수군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전투로써의 의의를 갖는다.
이 날 분멸된 왜선의 수만도 백여 척에 이르니, 실로 장쾌한 대첩이었다 할 것이다.
이 날 전투에서 조선수군 측은 31명의 전상자를 냈으니,
단 한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던 옥포해전에 비한다면 크나큰 피해라 할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내레이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8회에서 나왔으며,
해전의 전체적인 흐름을 담기보다는 정운이 전사한 것을 묘사하는 데 치중했다.
총탄에 맞아 전사한 실제와 달리 배에 날아든 비격진천뢰로부터
부하들과 배를 지키기 위해 포탄을 감싸안고 폭사한 걸로 각색했다.
또한 부산포해전이 있기 전의 과정을 시작으로 조정과 이순신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급을 취하지 않았는데 어찌 승전으로 보느냐는 의견과 전선을 백여척 넘게 격파했으니 승전이라는 의견이 갈린다.
명량의 스핀오프작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한산도대첩 이후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던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정박한 일본함대를 포격하자
도도 다카도라가 해전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진영 중앙에서 이를 지켜보는 장면으로 가볍게 나온다.
다만 정운의 전사는 나오지 않는다.
7. 관련 문서
이순신
임진왜란
전투 목록/한국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