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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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나무위키 : 2023-02-12 16:58:02
출생 1880년1월26일 미합중국 아칸소 주 리틀록
사망 1964년4월5일 (향년 84세) 미합중국 워싱턴 D.C.
복무기간 1903년~1937년 1941년~1964년[2]
최종계급 미합중국 육군원수 (General of the Army U.S. Army)
필리핀 육군원수 (Field Marshal Philippine Army)
근무직위 UN군사령부사령관
참전
멕시코 혁명(1910~1920)
제1차세계 대전(1914~1918)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6.25전쟁(1950~1953)
1. 개요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통칭 맥아더 장군.[6]
미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장성 중 한 명이다.
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용장,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집안 역시 명문 군인가문이어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육군장성으로서 필리핀의 군정총독이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미 1910년~1920년 대에 국가적 영웅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수석졸업, 최연소 육군사관학교교장, 최연소 육군소장, 최연소 육군대장이자 육군참모총장,
육군원수까지 군의 주요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고
한국의 6.25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총사령관, 육군원수로서 지휘[7]했으며,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푸른 눈의 쇼군 내지는 백인 천황, 일본 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8]
그렇기에 전후 일본사회의 구조에는 그의 입김이 많이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60년 동안의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9][10]
6.25전쟁에서도 유엔군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11]
수여받은 약장은 매우 비범하다.
약장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훈장부터 시작해서 하나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 수훈십자장 3회 수훈
(천만에 가까운 미육군 누적 참전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1만3천명만 수훈받았다.),
하나 받아도 베테랑 병사 취급받는 은성훈장 6회 수훈,
V기장(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이 달린 동성훈장 수훈,
육군 수훈복무훈장 4회 수훈,
대통령 부대 표창 6회 수훈,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훈,
그 외에도 육군항공 조종사 마스터 기장,
소총, 권총 특등 사격기장까지 약장만 봐도 어마어마한 名將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였다.
6.25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과 중국으로의 확전을 반대한 군통수권자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되는 등,
미군역사에서 문민통제에 역행했던 대표적 장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는 화려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어록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12]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13]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 명예(Honor), 국가(Country)[14]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 있는 생각은
생도대, 생도대, 그리고 생도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15]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뚫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실제로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밤을 보내거나 잠을 잔 적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16]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17]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I shall return.)[18]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합니다.
필리핀의 국민들께: 제가 돌아왔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19][의역]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21]
"조종사라는 고급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기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22]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23]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자동화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천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신분인 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 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 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24]
나는 조국의 안녕에 대해 걱정을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내부의 적이다.
러시아군의 노력은 규모나 장엄함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25]
미국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Amercans never quit.)
어떤 사람보다도 군인들은 평화를 바란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고통받고 가장 아픈 상처까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 군인이기 때문이다.
(The solider above all others prays for peace, for it is the solider
who must suffer and bear the deepest wounds and scars of war.)
5. 후손
명성과 경력을 비롯한 스케일에 비해 의외로 자녀 수는 매우 적었는데
아들인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 4세 한 사람 외에는 자녀가 없었다.
맥아더의 외아들인 아서는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아예 자신의 성을 바꾸며 집안과 끊다시피 하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해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만 알려진 상태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완전 허구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와 연락이 되는 친척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의 경우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26],
아서 맥아더 4세의 경우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늦둥이 아들이자 유일한 자녀인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비상해져서
어렸을 때 이미 라이프 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였다.
또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고작 7살의 꼬마 소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한 나라의 왕자나 다름 없는 위치였고
지금으로 따지면 셀럽과 같은 상황이었으며 세간의 관심 또한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라도 장성하면서 그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성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그의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를 지나치게 스타로 만들면 안 된다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 매우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형제 이름을 붙여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아서 맥아더 4세이다.
6. 기타
옷차림새가 대단히 특이하다.
필리핀 육군원수 정모에 짙은 레이밴 선글라스,
수제 콘파이프 담배인 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트레이드 마크.
필리핀 원수 정모,[27]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이려고 콘파이프를 사용한 건 아니고
바빠서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해 여벌로 준비해놓은 콘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 사진을 찍혔는데
하필 이 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던 것.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시대를 앞서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28]
콘콥은 가격이 저렴하기는 하지만 내구성(특히 내열성)이 별로라 오래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소모품인 것으로 2020년 한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렴한 것은 만원 대 가격이다.
저렴한 것은 6만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는 브라이어(브뤼에르) 목재 파이프의 경우
저가 보급형이라도 관리만 적당히 해주면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비해
콘콥은 만원 대지만 잘 써도 1년 쓰기가 어려우니 싸지만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히려 비경제적인 것.
따라서 보급형에 가까운 콘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애용하는 파이프는 따로 있지만
파이프 관리가 힘든 상황에서 막 쓰는 파이프로 사용하거나
굳이 돈을 주고 파이프를 사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는 경우다.[29]
즉, 맥아더의 아이콘인 콘콥의 경우
여기저기 전쟁터로 다닐 일이 많은 맥아더가
예비용 파이프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사진이 찍혔고[30]
이후 대중적 이미지 조성과 득표를 위한 호응[31]을 위해 사용했다고 보는 정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특히 주로 사진에 나오는 콘콥은 실제로 물어보면 더럽게 크고 무겁다.
요즘에도 '맥아더 콘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되고 있는데
일반적인 파이프보다 거의 3배는 무겁고 담배를 3배는 오래필 수 있다.[32]
그러니까 맥아더가 콘콥을 떡하니 물고 사진은 맥아더다운 멋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화려한 사관학교 시절 성적이 증명하듯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고, 교양과 학식 또한 높았다.
그가 남긴 많은 명언들이 그렇듯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도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외모 또한 큰 키에 귀족적인 풍모가 있어서 정말 누가 보아도 엘리트 군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6월27일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해서 한강 이북의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어느 한국군 병사에게 맥아더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고 묻자,
그 병사는 "상관의 후퇴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탄복한 맥아더가 무슨 소원이 없냐고 묻자,
병사는 "국군에는 소총밖에 지급되어있지 않고 그나마도 탄약이 부족합니다!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33]
이에 감격한 맥아더는 바로 지원군 파견을 승인했다.[34]
참고로 이때 맥아더의 시찰비행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이 만남의 주인공이 2013년에 작고한 신동수 씨라고 하는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부정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하면서 예상이 빗나갔다.[35]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1970년대[36]에는 양담배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이 때문인지 다음 만화속세상 '도사랜드'에서
무당인 주인공의 어머니가 섬기는 제네럴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3화부터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현재도 인천광역시에는 다수 있다.
사례1 사례2 여담으로 맥아더 본인의 종교는 개신교였다.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그러나 2005년에 NL성향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일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명예롭지 않은 역사도 역사기에
기념물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던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하문 터널 옆 정확히는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1사태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그외 맥아더 장군 동상은 경복궁 경내와 반공회관(현 광화문 KT사옥) 앞에도 1960년대 말까지 있었다.
호주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호주는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주력 사단이 대부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전선에 파병나간 상황이라,
예상되는 일본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미국의 급조된 2선급 사단과 준정규군인 호주 민병대를 이끌고
뉴기니 전선에서 악전고투,[37]
일본군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면서 버텨내고,
산호해 해전에서 미함대가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호주는 일본의 위협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
그리고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 이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지상전력이 급격히 소모되면서,
호주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소규모 일본군 병력이 호주 서부에 상륙했다는 떡밥이 있긴 한데,
어차피 전황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은 관계로 무시당했다(...).
이렇게 보면 호주에서 맥아더를 높이 평가해야 맞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평가는 높지만,
막상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이후로는
맥아더는 호주군의 주임무를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 정도로 한정지었다.
개전 초기, 가장 어려운 전선에서 열악한 여건에도 용감히 싸웠던 호주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다만 이것은 맥아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한숨 돌린 1943년 후반 이후 미국은 전후 국제정치 판도를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호주군이 필리핀 상륙까지 동행하면서 남서태평양 일대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호주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전후의 인도네시아 독립과 엮여 어쩌면 태평양권의 군도 몇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38]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 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맥아더는 전함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펜을 사용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만년필 외에 5개의 펜을 더 사용한 것인데,
이는 종전문서에 서명한 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5개를 더 만든 것이다.
이 중 2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조인식에 초대된
조나단 웨인라이트 미육군중장과 아서 퍼시벌 영국육군중장[41]에게 각각 1개씩 선물로 주어졌다.
1개는 아들에게 물려줬고,
1개는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보냈고,
마지막 1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냈다.
맥아더라는 인물의 치밀함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다.[42]
여담의 여담으로 이 만년필은 모두 Parker사의 듀오폴드 만년필로,
이 때문에 파커 사는 맥아더를 기리는 한정판을 발매하기도 했다.
이승만이 선물한 향로를 부대에도 가지고 와 전시했는데
적군의 기습으로 급히 비행기로 퇴각하다 한 장교가 향로를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린 것에 분노,
열흘간 온 해군을 소집해 태평양 지대를 뒤진다.
작전명은 '향로 찾기'.
이승만이 선물한 향로가 아니라
고종황제가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아버지 맥아더에게 선물한 향로를
필리핀 퇴각상황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후에 이승만이 이 소식을 듣고 똑같은 국보급 향로를 선물로 전달하게 된다.
맥아더 원수의 무공훈장에 네번째 백엽 장식을 서훈하는 트루먼 대통령.
사진 맨 오른편은 오마 브래들리 원수. 1950년10월15일 웨이크 섬.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43]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 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자면
"70살 처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들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온"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신경 안 쓰지만
다시는 군통수권자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44]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 토론 중 맥아더를 언급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아더 원수를 가장 좋아하는 장군으로 언급하며,
반대로 제임스 매티스 장군은 가장 과대 평가된 장군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2017년12월17일,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라우니가 별세했다.
최종계급은 예비역 중장으로 향년 100세.
여러 모로 맥아더의 파면은 이승만 입장에선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1951년 당시엔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 앞에서 통일을 놓치게 된 상황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하였으나,
미국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은 제3차세계 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기존의 남한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나면 바로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45]
맥아더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여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는데
맥아더가 파면되었으니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친 셈이었다.
맥아더의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의 리베르소 모델이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롱아일랜드 맥아더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맥아더는 이곳 출신도 아니고 공항을 방문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의 필리핀 탈출 무용담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해서 붙여진 이름.
서울 워커힐호텔의 더글라스 하우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워커힐호텔은 1963년 미군휴양지로 개관을 한 까닭에 호텔 내 건물 모두 참전미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숭배한 바 있다.
우상숭배 항목에도 언급될 정도로 강했다.
연합군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재임시절
일본사람들의 편지를 44만여통이나 왔고
대부분 맥아더를 구세주, 신과 같은 자비 등등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내용까지 있어 담당관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신체 스펙을 보자면 당대 한국인 성인남성 평균신장은 160~165cm 사이에
미국성인남성 평균신장이 175cm 안팎이었는데
맥아더는 이렇게 따진다 하더라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다.
그래서 6.25전쟁을 묘사한 창작물에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거인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히로히토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키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심한데,
이건 당대 기준으로 보면 히로히토가 평범한 신장이고 맥아더가 거인인 것이다.
8. 둘러보기
[1] 자세한 건 밑에 이름 표기 참고
[2] 원수는 정년 없이 종신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근무는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 게 가능하다.
원수 개인이 "전역"을 희망하면 예비역으로 신분전환되는데,
이를 이용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잠시 전역신청 후 대통령 임기만료 뒤 육군의 예비역 소집명령을 받는 식으로 다시 육군원수 자리를 유지했다.
[3] 예비역 미국육군중장 출신
[4] 일찍 요절했다.
[5] 맥아더는 명예훈장을 비롯한 미군 소속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보통 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DSM, 수훈복무훈장)만을 근무복 등에 정장으로 차고 다녔다.
후줄근한 근무복에 더 상위의 훈장을 많이 수훈받았음에도
약장을 니미츠처럼 줄여서 달고 다닌 것도 아니고
유독 수훈복무훈장만, 그것도 약장도 아닌 정장으로 차고 다닌 부분은
맥아더의 아이덴티티인 담배 파이프, 필리핀 원수모와 함께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6] 또는 맥아더 원수.
[7] 아이젠하워는 유럽방면 연합군총사령관 육군원수로서 연합군을 지휘했다.
[8] 사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 당시 맥아더의 권위와 권력은 쇼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적어도 쇼군은 최고권력자였지만 천황의 신하인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맥아더는 쇼와 천황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천황 아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덴노건 쇼군이건 결국에는 일본 내에서 일본 내의 무언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맥아더는 미국이라는 엄청난 대국을 뒤에 둔 미국의 고위인사인데다가
2차세계대전 승전으로 미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직접적 패전국인 일본에서 절대자일 수 밖에 없었다.
[9] 제2차세계대전 이후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인데,
이 리스트에서 맥아더는 마하트마 간디, 덩샤오핑, 아웅 산 수지, 리콴유, 코라손 아키노 등과 함께
정치인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작 일본 태생의 정치인은 리스트에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10] 전후 일본의 경제적 재건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LA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경제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으며,
정치인 중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
[11] 다만 이 비판이 무색하게 맥아더 본인도 6.25전쟁 당시 만주지역에 핵공격을 주장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결국엔 해임당했다.
[12] 본래 옛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맥아더가 한 말로 기억되고 있다.
[13] 퇴역식의 연설 중 나온 어록이다.
[14] 위에 소개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와는 달리, 이 말은 맥아더의 오리지널 어록이다.
[15] 1962년5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생도들에게 '군인이 명심해야 할 가치'로 역설한 말이다.
[16]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
[17]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
[18]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19] 위 연설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필리핀 수복 직후의 연설이다.
[의역] 필리핀의 국민들께,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씀드립니다. 내가 돌아왔다. 응?
[21]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보통 일본을 놀릴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고
당시 일본인들도 격분했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이 45세의 지능범이라면 일본은 12세 소년이니 벌을 주기보다는 이끌어 줘야한다고
일본을 쉴드쳐준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미국은 계속 일본을 견제했다는 게 함정 그리고 미국은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22] 6.25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칼 맞아 죽은 쇼군들은 몇명 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테루 등...
[23]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24] Samuel Ulman(1840~1924)의 시로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점령군사령관 시절 집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읽었다.
[25] 제2차세계대전 당시 했던 말이다.
사실 독소전 초기 더글라스 맥아더 뿐만 아니라 니미츠와 아이젠하워를 포함하여
소련군의 군사업적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발언들을 많이 했다.
[26]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하였다.
미해군사관학교 엘머 B. 포터 교수의 저술로 1977년에 나온 니미츠 전기에 의하면,
니미츠 주니어는 부친의 후광과 그 자신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써 충분히 4성제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변질된(?) 해군장교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이 생겨
결국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27]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 사진에는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그나마 모자를 쓰지 않고 찍은 대표적인 것은 히로히토와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독일군마냥 정모를 찌그려 놓은 게 특징인데 이런 정모를 크러셔 캡이라고 부른다.
[28] 이렇게 당사자한테 의도치 않게 이미지를 주게 되는 비슷한 사례로 윈스턴 처칠이 있다.
괴벨스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슨 마피아 두목과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당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나치들을 정말로 마피아가 하는 것 마냥 모조리 소탕해버릴 듯한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우연을 겪은 또 다른 주인공으로는 KFC의 창업자인 할랜드 샌더스를 꼽을 수 있겠다.
겨울용 검은 정장을 세탁한 바람에 여름용 흰색 양복밖에 고를 수 없는 상황이어서
별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입고 나갔었는데,
되려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아예 그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가 바닷물을 헤치고 육지로 걸어오는 유명한 사진 역시
미군의 강인함과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다.
[29]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 미국 농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이웃집 옥수수대를 얻어서 햇볕에 말려뒀다가
직접 속을 파내서 파이프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30] 근데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맥아더가 콘콥을 호불호와 별개로 실제로 자주 쓰기는 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콘콥이 소모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젓가락에 비유하자면 은젓가락이나 자개로 장식된 젓가락과 같은 명품을 애장품으로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식사할 일이 많으면 1회용 나무 젓가락을 자주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도 여행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는 파이프 흡연자라면
훼손 또는 분실되거나 챙기기 번거로우면
버리고 와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콘콥 1~2개를 가방에 쑤셔넣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맥아더의 경우
아버지가 고종황제에게 선물받은 향로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다니며 전시했다고 할 정도로
호사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는 하나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군인의 입장에서 파이프와 같은 사소한 물건일수록
쉽게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을 자주 쓰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31] 대통령후보 출마 시에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주민들에게
콘콥은 몇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아이콘이다.
[32] 일반적인 파이프가 1시간 정도 피울 수 있다.
[33] 이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영화)에서 나왔다.
[34] 하지만 이와 별개로 다른 미군장교들은 한국군의 군기와 전투력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투입된 스미스 대대의 군기와 전투력도 개판 5분 전이었다는 사실.
[35] 사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10년도 되지않아 나라가 두동강난데이어
전쟁으로 낙동강 바깥 지역의 국토는 모조리 황폐화되고
수십만의 청년들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도 북한군과 국군 혹은 유엔군에게 학살당하기까지 해서
국가역량을 책임질 청년층의 감소까지 겪었으니
일반적인 생각으론 나라가 망하지 않는 걸 기적으로 여겨야할 판이다.
즉, 맥아더의 예상은 이런 상황에선 지극히 당연했던 것.
[36] 1980년대 걸쳐서 최근까지도...
[37]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코코다 트랙 전투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트롤링만 일삼았고 제대로 싸운 이는 현지의 호주군 지휘관이었다.
[38] 동티모르 사태에서도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대립하는 관계였다.
[41] 싱가포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42] 단 이는 의외로 흔한 사례로,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의 경우에도 한번의 서명에 20여개에 달하는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했다.
[43]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
[44]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45] 미국측도 휴전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알 수 있는데,
우선 회담장을 개성으로 정한 점,
전쟁 중이지만 개성만큼은 절대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공산군 측에 말한 점 등이 대표적이다.
[46]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를 번역한 역자다.
그외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올레크의 스탈린 평전,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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