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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eson line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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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4-07-18 19:33 View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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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라인

나무위키 : 2024-07-15 19:56:06


애치슨 라인


1. 개요

Acheson line은 1950년1월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 미국 신문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2. 애치슨의 연설 내용

다음은 애치슨의 <아시아의 위기> 연설중에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는 부분이다.


태평양의 다른 지역들의 군사안보에 관련되어 있는 한, 

그 누구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관계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보장이 타당하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공격이 발생한다면... 

초기에는 공격받은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도록 의지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외부의 침략에 맞서서 독립성을 지키기로 결심한 그 어떤 사람도 

의지할 수 있는 약한 갈대가 입증되지 않은 NU 헌장에 따른 문명세계 전체의 헌신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태평양과 극동 문제를 고려할 때 군사적인 고려에 집착하게 되는 건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이지만, 압박을 가하는 다른 문제들도 있고, 

이러한 다른 문제들은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다른 문제들은 많은 지역과 태평양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체제 전복과 침투에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것은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멈출 수 없습니다...

딘 애치슨, National Press Club, 1950. 1. 12


위 연설에서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 바깥 지역에 대한 침공이 발생하면 

먼저 침공을 당한 국가가 스스로 저항해야 하고, 

유엔 아래 문명세계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며, 

태평양과 극동지역에서의 문제에 군사적 해결책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3. 애치슨 선언의 배경

1949년8월, 미국의 중국학자 Owen Lattimore 교수는 

미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제출한 남한 정책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a]

남한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정도 지속될 것인가는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의견서는 1950년4월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래티모어는 수일 후 상원에 출석하여 한국에 대한 원조 중지를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12월 결의에서 

"만약에 공산군이 남한에 대하여 무력 침입을 행하더라도 

미국은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 의견을 밝혔다.[a] 

이처럼 당대 미국정부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얻을 지정학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4],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도래한 냉전의 긴장 속에서 

소련이 태평양 방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염려하여 대한민국에 충분한 무기도 제공하기를 꺼렸다.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선언은 이러한 미국 조야와 국무부의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섬, 인도차이나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 라기보다는, 

침공받은 국가가 일차적으로 방어하고 유엔이 사후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연설문 원본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애치슨이 소위 '애치슨 라인'을 가리키며 쓴 단어는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이는 만약 이 나라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지원해준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국내여론도 이렇게 인식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 씨는 지난 12일 기자단 클럽에서 미국의 대극동정책을 발표했다. 

본 장관[인용자주1]은 이번 애치슨 씨의 발표에 대하여 

미국이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여러 민주국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박력있는 정책을 확고히 고집하고 있는데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아시아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고 

악독한 공산주의 침략의 전선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이제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바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국 국민은 더욱 공고하고도 단결된 힘으로써 그들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궐기하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결의를 가진 자유국가 인민에 대한 책임감을 

이제 명확히 발표한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메어진 사명과 책임은 또한 한미양국의 유대성을 굳게하는 것이며 

미국이 아시아에 있어서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공동의 책임을 가진다는 것은 

한국민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키는 것이다. 

이에 이 대통령[인용자주2]을 비롯하여 본 장관은 

이 한국민의 뜻을 트루먼 씨 그리고 애치슨 씨에게 전하는 바이다.


"일강화참가기약 미의 대한원조책에 감사" 경향신문 1950. 01. 15 보도#

당시 애치슨 선언에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조속히 애치슨과 접촉하도록 했으나, 

애치슨이 의회 출석으로 부재중이라서, 

William Butterworth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대신 만났다. 

이승만은 한국을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서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한국의 방위를 포기하는게 아니라면서 원조를 약속했다. 

이후 1950년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0년2월10일, 미국 의회에서 한국 원조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한국도 안심하게 된다.


또한 애치슨 라인 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었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다.[7][8] 

일본은 국권회복 이전으로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인데다 자국의 군대도 있었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되었다면 오히려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이었던 타이완 역시 애치슨 라인에서 빠졌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렀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상태가 엉망이 되었다.[9][10][11]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 주둔이 없어도 방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와 전략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12]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13] 

1950년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되어 서구 열강에 맞먹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전략적 실수를 연발한 끝에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14] 


1948년 앨버트 웨드마이어의 보고서가 제출될 당시 

남한의 전력은 경찰 2만8천명, 경비대 1만6천명 수준이었으나 

1950년 전쟁 직전에는 경찰 2만5천명, 국군 10만명 규모로 증강되었고 

미국은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이 북한을 압도할 전력을 구비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이 정도면 미군 증원 전까지 서울 방위는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4. 전개

애치슨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포기를 주장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것은 물론, 

자국인 미국 내 보수진영에서도 6.25전쟁과 공산진영 확대의 주범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46년에만 해도 한반도에는 미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M7 프리스트나 M18 헬캣 같이 T-34에 유효타를 줄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빼버리는 바람에 한국은 부산 앞까지 밀려버리고, 나중에 투입된 미군의 피해 또한 커졌다. 

실제로도 1950년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군비를 썼고 3만6천여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외교전략을 수정해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 

이 전쟁과 전후처리 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덤으로 애치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회생을 앞당긴 구원투수로 지목받았다.

그가 야기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군수품 생산을 하청해 벌어들인 $가 일본의 전후복구에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는데 

유럽주둔 미군까지 한반도로 차출돼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추축국이었던 독일은 1955년, 정식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본에도 상당한 수준의 재무장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일부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일본의 재무장과 재벌부활이 이미 계획중이었다며 애치슨 라인의 영향을 축소하려 들지만, 

이는 애치슨 라인을 한국에만 국한해서 본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위 지도에서 보듯 당시 1세계진영이던 국민당의 중국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 빠져있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방지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5] 

이렇게 유럽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 일본 및 남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나마 한국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6.25전쟁 이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 미국의 패권정책을 기반을 다져놓은 게 이 사람이고, 

오히려 한국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당시 국무부가 NSC-68을 제안했으나, 트루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6.25로 인해서 공산권의 전쟁의욕을 직접적으로 느끼자 통과돼 

2차 대전 종전부터 군축을 하던 미국은 이 때를 기점으로 군비확장을 시작했다.


2006년 동북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을 때 

"애치슨 라인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을 미국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이라고 해서 북한의 오판을 가져왔다"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에 

아미티지 전 부장관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잘못됐다며 당시 미군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중국이 부상하고 대한민국과 대만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의 중요 동맹국이 되자 

미국정계는 하마터면 애치슨 때문에 중요 동맹국이 날아갈 뻔 했다고 보기도 한다.[16]


5. 영향

애치슨 라인 선언은 김일성의 남침결정에 파란불을 켜주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박명림, 션즈화, 매트레이 등 한국전쟁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애치슨 라인 선언이 북한의 남침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애치슨의 선언이 파란불을 켜줬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곳이 

당시 야당인 미국 공화당이라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즉 애치슨 라인은 전쟁 자체보단 전쟁 중 그리고 전후에 제기된 해석에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애치슨 라인이 남침결행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이것이 발전하여 북한의 남침을 미국이 유도했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 자체가 우연이나 정황근거에만 바탕을 두었고, 

이것을 반박하는 자료들은 모조리 무시하거나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일련의 확증편향을 거치며 발전했다.


5.1.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에게 94년6월 전달한 2백건의 구소련 한국전관련 문서를 

면밀히 검토한 위더스비교수 등 많은 학자들은 

김일성이 빠르면 49년5월 소련방문때 자신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에게 승인해줄 것을 졸랐으며, 

50년4월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주장을 근거로 

미국은 북한이 한국을 정복하는 것을 저지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매트레이교수(뉴멕시코대) 미 참전비 제막기념 세미나서 주장

(서울신문, 기사작성일자 1995.07.26 00:00)#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6월26일 철수했다. 

미국 군부는 한반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는데, 

미국 국무부는 한반도에서의 조기철수에 반대했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의 맥아더 파벌이 한반도의 수호를 주장했다.


참고로 남침유도설을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 또한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은 정작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남침을 위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물자와 병력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충하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17]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 발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전후 미국의 對남한정책과 실제 김일성 및 스탈린의 반응 및 의도, 

선언 이후 한반도 정세변화의 추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계없이 이전부터 남침을 추진했으며, 

애치슨 라인의 진의를 파악했다. 

애치슨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인해 남침을 추진하고 결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과 상관없이, 선언 전후로 남침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James I. Matray 교수에 따르면, 

김일성은 북한이 건국된 지(1948년9월9일) 몇달 만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49년3월5일 스탈린과의 회담 자리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의지를 재확인하고 군사원조를 촉구했다. 

즉, 김일성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애치슨 라인 선언 12개월 전부터 남침을 추진했으며, 

이것은 애치슨 라인이 김일성의 남침추진 및 결행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9년8월12일에도 시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다시 남침승인을 촉구했다. 

이 요청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완범 교수의 논문을 통해 설명한다.


매트레이의 논문에 따르면 

9월12일 소련 대사관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두 사람은 제한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심지어 애치슨 라인 선언 닷새 후인 1950년1월17일 김일성이 다시 남침승인을 요청했을 때도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he was not ready to approve an invasion)." 


Kathryn Weathersby 교수가 발굴한 소련 외무부 문서고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북한의 남침 승인요청은 48회나 거절당한 후에야 받아들여졌다. 

그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추진한 냉전국제사 프로젝트(CWIHP)에 참여하여 

이러한 정보들을 찾아냈다.


1999년 웨더스비는 ‘다시 본 한국전쟁’이라는 글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49년 초부터 50년 초까지 ‘남조선 적화’를 자신하며 

남침승인을 무려 48차례나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애치슨 라인 선언과 상관없이 김일성은 꾸준히 남침을 추진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김일성의 남침결행에 영향을 미쳤을리는 만무하다. 

션즈화 또한 애치슨 라인 선언이 남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일축한다.


이완범 교수는 남한을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이 

북한 수뇌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애치슨 라인을 통한 남침유도론의 근거는 즉각적 개입밖에 없다면서 

확실한 증거 없이 추론에만 의존하는 음모론이라고 비판했다.


김일성과 함께 남침을 결정한 스탈린도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심이 없었다. 

다시 매트레이의 논문을 인용한다.


매트레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군대 증강을 지원한 요인을 따로 짚는데, 

이것은 후술할 것이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스탈린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48번이나 간청한 후에야 남침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김일성에게 애치슨 라인이 남침시 미국의 불개입을 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면, 

반드시 스탈린을 상대로 군사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단 한번도 스탈린에게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적이 없다. 

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나, 

또는 시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나 똑같았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의 방소는 

공식적으로 1949년2월말부터 보름 간, 1949년말, 

1950년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1952년9월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사이에 비공식적인 방문이 몇차례 더 있었다. 

스탈린의 남침승인은 3번째 공식방소인 1950년4월10일에 이루어졌는데, 

방소 당시 대화록에서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증거이다. 


매트레이의 논문도 스탈린과 김일성은 단 한번도 애치슨 선언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오히려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다고 설명한다.


만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을 눈여겨보았다면, 

북한의 남침 시 미국의 향후 대응을 논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회담 자리에서 애치슨 라인이 언급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더욱이 스탈린과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 이후로도 미국의 개입을 예상했다. 

1950년3월5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두차례 스탈린을 면담하고 남침승인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시기상조라면서 승인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전쟁이 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직접 말한 대목이 눈에 띈다.


만일 스탈린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의 남한 불개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어야 한다. 

또한 김일성은 스탈린이 우려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 애치슨 라인 등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했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애치슨 선언을 오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3번째 공식 방소 자리에서 스탈린의 발언, 

그리고 1950년4월 마오쩌둥과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발언에서도 직접 드러난다.


만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의 남한 불개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미국의 체계적 저항 및 국제사회의 지원 동원 우려는 없어야 하며, 

단시일 내로 남한 점령을 끝낼 것이니 미국의 개입을 걱정 안해도 된다는 발언도 없어야 한다. 


특히 김일성의 발언을 주목할 만 하다. 

김일성은 애치슨 선언이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을 너무 얕보았던 것이다.


이제 1950년 이후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가 이루어진 원인을 알아보자.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한 것이며,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의 원인은 다른 것이다. 

1949년 중순만 해도 남한은 군사적으로 명백히 북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1949년 초중반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은 7만명이었고 북한군의 병력은 5만명이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북한이 북침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1949년6월 미국이 남한에 주둔한 4만5천명을 철수하고 

500명 규모의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만 남겨놓자, 

이들의 불안감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들은 남한 내 미군의 존재가 이승만의 북침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확대하기로 결정한다. 매트레이의 논문이다.


즉 애치슨 선언보단 남한의 '북침' 위협(소련과 북한이 가정하던)으로부터 

북한의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원조를 보냈다는 것이 매트레이의 결론이다. 

사실 1950년2월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 결정 이전에도 

이미 1948년12월(애치슨 선언 1년1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만난 북중소 3개국 군사대표단이 

신생 북한군을 위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시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 내용은 북한군의 6개 보병사단을 돌격사단으로 개편하고, 

여기에 8개 전투사단과 8개 예비사단을 추가로 편성하며, 

중국은 조선족 병사 2만~2만5천명을 입북시켜 인민군의 기간요원으로 제공하며[30], 

기갑부대는 소련이 제공하는 500대 전차로 2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하기로 되어있었다. 


합의안이 원안대로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31] 남침을 결행하기는 충분한 전력이었고, 

합의에 들어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공군 전력도 1949년3월 Il-10 지상공격기, Yak-9 전투기 등으로 먼저 30대를 배송했다. 

이게 전부 애치슨 선언 전의 일이다. 

즉 소련과 중국의 군사원조는 애치슨 선언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미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트레이의 논문은 다음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맺는다.


(전략)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생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역자주2]을 제거하기 전에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었다.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애치슨 라인 선언 전후로, 미국은 지속적으로 남한 군사원조 및 유사시 군사개입을 천명했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선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사시 미국의 군사원조 및 개입을 명문화하고 수차례 공표했다. 

박명림의 책이다.


애치슨 라인 선언 이후 한국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1950년 초의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6.25전쟁 직전 미군이 국군 포병대 창설을 도우면서 

포탄 낭비가 심하다며 대전차포탄 보급을 통제할 정도로 국군의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국군 포병대의 탄약 낭비가 상상 이상으로 심한 것이 현실이었다. 

1949년 후반기 벌어진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4,700여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T-34는 57mm 대전차포로 320m 이내에서 격파할 수 있고 

실제로 철갑탄을 사용해서 격파했다는 증언, 기록이 있다. 

물론 코앞에서 쏴서 맞췄는데도 튕겨나갔다는 증언 및 기록[33]도 있다.


게다가 당시 미국 자체가 한창 군축중이라 

당장 24사단 전체에 대전차 고폭탄이 고작 18발에 불과했으니# 

한국군에게 포탄이며 장비를 펑펑 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34] 

여기에 6.25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북 강경론은 

미국은 물론이고 UN한국소위원회조차 우려를 표하며 한국군의 탄약불출에 제동을 걸 지경이었다. 

당시엔 중국이 무너진 상태였고,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핵 우위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 정부나 서로서로 고강도 도발 발언을 쏟아내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조마조마한 것도 당연. 

이는 처음부터 미국이 한반도에 설사 무력충돌이 나더라도 

48~50년 상황같은 저강도 국지전이 지속되리라고 보고 있었고, 

한반도 전쟁 특유의 화력전 양상은 

미국은 여태껏 듣도보도 못한 방식이라 그런게 가능하리라 생각도 못하고 

한반도 지형이면 산악전이나 얼마 안되는 좁은 공간에서 기동전하면 되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5.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나는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해리 S.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원조 개시를 역설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조지 C. 마셜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마셜은 

이제 소련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미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국무차관은 딘 애치슨이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또 하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상원의원들은 경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극동의 전쟁에 개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마셜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6. 대중매체

대체역사소설인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35]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6.25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사후에도 비난받는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36]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 6.25전쟁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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