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 - 1 고대/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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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공국에서 시작되어 현대의 우크라이나 독립(1991년),
그리고 오렌지혁명과 유로마이단까지 설명한다.
2. 고대
고대 그리스인 역사가들이 보리스테네스 강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드네프르 강 유역은
동유럽의 대표 평원지대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33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나타나
모계 사회를 가진 원주민들을 정복하며, 정착했다고 한다.
기원전 8세기 무렵 스키타이족이 이 지역의 원주민인 킴메르족을 몰아내고 정착했다.
때마침 고대 그리스인들도 기원전 8세기부터 흑해 연안에 여러 식민 도시[1]들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흑해 해안가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한 그리스인들은
이들에게 올리브와 포도주가 담긴 항아리를 팔고, 밀을 구입해서 식량이 부족했던 아테네에 수출하였다.
그리스산 물산은 스키타이족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지
오늘날의 키이우, 하르키우, 폴타바 등에서 그리스 도자기들과 그리스 드라크마 화폐가 발굴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의 스키타이인이 노예로 붙잡혀 아테네로 팔려가는 일도 생겼는데,
아테네인들은 이들 스키타이인들이 유달리 피부가 희다고 기록했다.[2]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스키타이족이
같은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인, 알란인에게 밀려나 몰락하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리스인들이 흑해에 세운 식민 도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흑해의 그리스인들은 보스포로스 왕국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흑해 무역을 지속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중간에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으로 자리잡았다.
서기 3세기 무렵에는 드네프르 강 일대에는 새로이 게르만계 고트족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비옥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세력을 키운 고트족이었지만,
새로이 아시아 초원에서 나타난 훈족의 침략을 받자
이들 대다수는 다시 드네프르 강 평야를 버리고 난민 혹은 침략자가 되어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로마 제국으로 이동했다.
훈족 역시 이후 몰락했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버리자
공백지가 되다시피 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 슬라브족들이 대거 이주했다.
4~5세기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 쪽으로 이주하고
그 사이에 고대 슬라브족인 베네디족(웬드족), 스클라베니족, 안테스족이 게르만족의 빈자리를 점거하며
중유럽과 남유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스클라베니족은 슬라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한편 드네스트르 강과 드니프로 강 유역 및 아조프 해 연안에 이르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땅에는
얀테스족이 이주해서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 알란족, 사르마트족과 섞여 살았다.
그리고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들이
슬라브 민족과 통혼하여 혼혈화하면서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었고, 이들이 우크라이나인의 시조가 되었다.
6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는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족들은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이방인 손님들을 환대하며, 성격이 유쾌하다고 기록했다.
이때도 동유럽 특유의 술에 찌든 호탕함이 있었나보다
3. 중세 초
7세기 말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은
이전에 우크라이나에 들어왔던 훈족이나 아바르족과는 다르게
일방적인 파괴와 노예화는 지양하고, 슬라브족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교역하였다.
이들의 전임자였던 아바르족들이 기회만 되면 동로마 제국에 슬라브족들을 이끌고 쳐들어갔던 것과 다르게
하자르 칸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무역 거점들을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신경을 썼다.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 연안은 200년 가까이 '팍스 하자리카'를 누렸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인들은 꿀과 밀랍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층인 아크 하자르인들은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인과 거의 동화되어 밝은 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했다.
모든 슬라브가 카간을 자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간'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던 930년경 이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하는 슬라브족들이
아랍과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었다.
노르드계 바이킹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지면서 무역, 약탈 기지들을 개척했고,
이러한 과정 중에 바이킹들의 분파인 바랑인(루스)들이 세운 루스 카간국이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거점을 옮기면서 키예프 공국이 나타났다.
3.1. 키예프 공국[편집]
류리크가 지금의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류리크 왕조를 세우고,
류리크 이후 제2대 대공에 오른 바랑인 올레그가 882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정복하고
중심지를 이 곳으로 옮겨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동슬라브 3국의 정체성이 구별되기 전에 존재했던 나라로 러시아 역사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였다.
당시 키예프 루스인들은
겨울에 벌목을 해서 만든 목재로 작은 배를 만들어 각기 특산물을 가지고 키예프로 집결한 후,
드니프로 강을 따라 함께 흑해로 내려갔다.
키예프에서 집결했다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유는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의 약탈과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랑인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공국이
10세기 사이에 하자르 칸국을 쳐부수고, 장악하던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던 공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명군인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시절
키예프 공국의 볼로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대교를 믿은 하자르 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불가르족,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왕국[3]같은
이웃 경쟁자들과 키예프 공국을 차별화하려는 의도였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대 모라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에 선교를 하면서 만든 키릴 문자가 나중에 키예프 루스에도 도입되었다.
이 시기의 키예프 공국은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스칸디아비아와 흑해를 잇는 교역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아바스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직수입한 문물을 통해서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다.
불가리아어를 바탕으로 한 교회 슬라브어로 중세 초부터 중세 말까지 러시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나 행정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으며,
안정되지 않은 공위 계승권 문제로 잦은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앙집권은 커녕 공위 계승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공위 계승권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이 흔했고,
흑해 연안의 페체네그인, 쿠만인들과 같은 유목민들과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종종 야로슬라프 1세가 페체네그족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거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루스를 재결합할 때도 있었지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교역로가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키예프가 위치한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는 키예프 공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탁 트인 평야 지대인 특성상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기 힘든 위치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아크레, 야파 같은 십자군 도시들과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직거래를 시작하자
흑해 무역이 쇠퇴하자, 키예프 공국은 전사집단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쇠락한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자마자
키예프를 비롯한 도시 대부분이 말 그대로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50만명 이상의 루스인들이 몽골인의 침략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4]
멀리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 이외의 주요 키예프 공국 도시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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