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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 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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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6-06 13:21 View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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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세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1222~1223년부터 개시된 몽골의 침략 결과 

수즈달, 리야진(랴잔), 키예프 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했다. 

키예프 루스 영토였던 곳 대다수는 몽골과 튀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울한 지배기에 놓이게 되었다.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 관리들의 주요 일과 중에 하나는 

세금을 늦게 내는 농민들을 거꾸로 묶어놓고 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공국의 중흥을 이끈 이반 1세의 '깔리타(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나온 배경 또한 이와 같았다.


한편, 키예프 대공국의 남서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자리잡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지방은 몽골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키예프 루스가 처참하게 무너지자 

대공 다닐로는 바투 칸에게 직접 가서 굴욕을 감수하고 신종해 일단 위기를 넘겼다.

이 지역은 공후들보다는 지주들의 힘이 더 막강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고 키이우 등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가 몽골의 직할 지배를 받으면서 

키예프 루스 후계 국가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이때까진 루스 세계의 변방에 있었지만 

독립을 지키고 이후 힘을 길러 루스 영역의 최강국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직계로 계통이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의 이 갈리치아-볼히니아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이 루테니아 왕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5]


아직 볼히니아 공국이 키예프 루스에 속해 있던 시절인 1187년, 

헝가리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다 실패했으며, 

12년 후 볼히니아의 공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합병하여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일함으로써 

갈라치아-볼히니아 공국이 되었다. 


로만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의 요청을 받고, 튀르크계 쿠만족들과 싸워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1201년 발칸 반도에서 쿠만인들을 축출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했다. 

로만은 나이 든 상태에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1205년 폴란드인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로만이 죽은 당시 큰아들 다닐로는 겨우 세 살이었고, 막내아들 바실코는 돌잡이 아기였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간섭을 받으며 다시 분열되었다.[6]


로만의 아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이웃 지역 공후들의 궁정에서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일반 루테니아인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현실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만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다닐로는 1221년부터 1264년까지 재위하며 선정을 펼쳐 볼히니아를 부흥시켰다. 


1230년대가 되자 다닐로와 그의 형제들은 볼히니아를 헝가리 왕국로부터 탈환하였다. 

다닐로는 세금을 감면하고 도시의 민회를 부흥시켰기에 언제나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245년 다닐로와 바실코는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갈리치아의 로스티슬라프 공을 격파하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다시 통일했다. 

갈리치아로 건너간 다닐로는 리비우 시를 건설했고, 

그의 동생 바실코는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 다르게 이들은 통치권을 나누고 나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파괴시켜려 들자 

다닐로는 당장 무리하게 싸우는 방법 대신에 직접 가서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택했고, 

이 와중에 타타르에게 향하는 로마 교황의 사절들과 합류했다. 

다닐로는 루테니아인들이 가톨릭 유럽과 힘을 합쳐서 타타르인을 무찌르는 계획을 세우고, 

이 와중에 1253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는다.[7] 


다닐로가 왕위를 승인받은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이름은 루테니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결국 다닐로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톨릭에 대한 정교회 주민들의 반감으로 결국 교황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지만, 

왕이라는 칭호와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닐로는 키예프를 몽골인들로부터 탈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타타르인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1264년 다닐로가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바실코도 형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루테니아 왕은 다닐로의 아들 레우 1세가 계승했다. 

서유럽의 힘을 빌려 몽골에 대적한 아버지와 달리 레우 1세는 

몽골과 친하게 지내며 서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의 지배권을 두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결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위협하고 루블린을 차지하는 등 

레우 1세는 루테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301년 레우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유리 1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유리 1세의 치세 아래에서 루테니아 왕국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으나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루블린을 다시 빼앗기는 등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 1세는 7년의 짧은 치세 이후 1308년에 사망했고,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안드리와 레우 2세 형제가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형제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리투아니아와 몽골에 대적했는데 

1323년 몽골과의 전쟁에서 형제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형제 모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루테니아 왕국을 다스리던 다닐로의 직계는 끊기고 말았고, 

루테니아 왕국은 다시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로 분열되어 

갈리치아는 루스인 보야르들이 차지하고,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공작 류바르타스가 차지했다. 

일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야르 3자 간의 합의로 

유리 1세의 외손자였던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가 '유리 2세'라는 이름으로 루테니아 왕에 등극했는데 

1340년 유리 2세의 등극 이후 커져가는 폴란드의 영향력에 반감을 가진 보야르가 유리 2세를 독살했다. 


이를 빌미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갈리치아를 침공해 1349년 전적으로 갈리치아를 합병했다. 

볼히니아는 류바르타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난 이후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1392년까지 전쟁을 벌이다가 

1392년 오스트루프 협정으로 갈리치아는 폴란드에,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로 분할한다는 합의를 보고 분쟁을 끝냈다.


4.2. 리투아니아 대공국[편집]

중세 가톨릭권에서는 정교회 루스인들이 사는 지역을 라틴어로 러시아라는 뜻의 루테니아라고 불렀다. 

이른바 루테니아라고 불린 지역 대부분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 과정 와중에 리투아니아 영토로 흡수되었다. 

당시 몽골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슬라브인들에게 공물을 부과하고, 종종 쳐들어가서 노예로 팔 생각만 하며 관리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이 틈새를 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이 지배하고 있던 과거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흑해 인근까지 타타르인들을 밀어부쳤는데 

토크타미쉬 칸의 타타르군에게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저지당하기 이전까지,[8] 

영토를 계속 확장시켜 나갔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북유럽부터 러시아까지 동서남북이 전부 기독교로 개종하는 와중에도 토착 다신교를 믿고 있다가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로[9]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리투아니아인들은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 일대의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해방자'를 자처하며 정교회 신도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게르만계 튜튼 기사단의 강제개종 및 체계적인 파괴나 몽골인들의 무차별적인 노예사냥에 비교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침공으로 인한 유혈사태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리투아니아는 루테니아 귀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였고, 이에 호응한 많은 도시들에 리투아니아군이 무혈입성했다.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1385~1386) 

발트 토속 신앙을 믿던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10] 

리투아니아인들이 발트 토속신앙을 믿었을 당시에는 

루테니아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과 통혼하고,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후계자를 칭하며 큰 마찰없이 잘 지냈지만, 

점점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들이 이주해오고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폴란드 가톨릭화되면서 

이후 일어날 커다란 불화의 씨가 뿌려진다.


동쪽에서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면서 

1430년 크림반도를 위시로한 크림반도 일대에 타타르인들의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은 유목과 농업을 부업으로 삼고 

슬라브인들이 사는 지역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11]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역할도 병행했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남부는 계속 타타르 세력의 노략질과 납치에 시달려야 했다.


15~16세기에 벌어진 크림 칸국의 침략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타타르족이 납치와 약탈만 주로 일삼으며 정착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는 많은 공백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크림 칸국의 전사들은 지주까지 싹 잡아가는 바람에 초르노젬으로 비옥한 드니프로 강 일대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해서 야생 상태로 복구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2] 

코사크들은 이 공백지들에 정착하여 독자적으로 크림 타타르족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해나간다.


북쪽의 모스크바 지역은 

노가이 칸국이나 크림 칸국의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의 정복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타르족의 눈치를 보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러시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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