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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 3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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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6-06 13:40 View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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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근세

5.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반 3세, 이반 4세 등 여러 유능한 군주들의 지도하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충돌하여 국경분쟁을 벌이고, 

타타르인들과 싸워나가면서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정체성을 세운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상황이 많이 달랐다. 

1569년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해 루블린 조약을 통해 동군연합 관계에 있었던 폴란드 왕국과 연방을 이루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나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폴란드 왕국에 반강제적으로 양도했다. 


폴란드 왕국의 법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보다 농민에게 더 가혹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법에는 농노가 영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폴란드 왕국 법에 의하면 왕령지의 농민이 아닌 이상 귀족 지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지방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도시민들의 곡물교역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귀족들은 

직접 사람들을 고용해 비스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운체계를 이용해 그단스크로 곡물을 실어날랐고, 

그곳에서 독일인 상인들이 곡물을 운송해 팔았다. 

서유럽과의 곡물교역에서 이득을 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군연합 시절부터 농민의 토지소유를 금지시키고 귀족소유 장원에 긴박시키는 조치를 잇따라 발표했다. 


귀족의 지배를 뿌리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의 변방으로 달아난 농민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전신인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된다. 

원래 자포로제 코사크는 14세기부터 존재했지만 

가혹한 농노제를 피해 달아난 농민들, 그리고 귀족을 포함한 다른 사회집단 출신의 이탈자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숫자가 불어났다. 


처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하며 동남부 국경지대를 타타르로부터 수호하던[13] 코사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종교 및 경제적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초기 코사크들의 저항은 산발적인 봉기에 그쳤지만,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코사크와 정교도들을 규합하자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층을 박살내는 수준의 거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사크 및 정교도 집단의 갈등은 

경제적 성격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다분히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많은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지방에 마름 혹은 잡상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정교회 신도들은 특히 야만인 취급을 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차별을 하여 종교분쟁을 일으켰다. 

정교회 신도들은 법원에서도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정교회 사회의 지도층은 가톨릭 귀족들의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하나둘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여기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 지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 마름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정교도 집단간의 갈등은 

단순히 계급적, 경제적 갈등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내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코사크들이 폴란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는 언제나 광범위한 유대인 학살이 동반되곤 했다.[14]


원래 우크라이나 지방 도시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정교도들은 

시간이 갈수록 폴란드인 귀족이나 유대인, 독일인 등이 도시에 유입되면서 입지가 점점 축소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계속 정교회 신도들의 입지가 추락하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 

정교도는 1570년대 리투아니아의 아카데미를 본 딴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당시 세워진 학교들은 

슬라브어-그리스어-라틴어로 교육했기 때문에 "그리스 학교" 혹은 "그리스-슬라브 학교"라고 불렸다. 


그리스-슬라브 학교들은 교수진의 부족으로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동유럽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남기는데 성공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580년에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슬라브어로 된 성경 완역본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을 얼마나 차별했는지에 관련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 네덜란드와 더불어 개인까지는 아니지만 

정치 참여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의 최소 단위인 귀족마다 성문화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나라였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침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타타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공백지가 된 우크라이나 일대에 

투기성 지주가 된 비시니오비에츠키, 자모이스키, 코드키에비츠 같은 거대 귀족가문들이 주도한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도 오스트로그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오히려 정교회 신앙 보존에 치중하면서도 세력, 권력 등은 하등 꿀릴게 없는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정교회를 의식적으로 차별했다기보단 반종교개혁 시대의 조류에 따라 귀족가문들 사이의 최고교육기관이 

예수회 학교들이 되었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정교도들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 맞서 정교도들도 자체적으로 몽골-타타르에게 얻어 맞고 리투아니아에게 종속화되면서 

자신들이 정신 못 차릴 사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서방 기독교의 제도적 우위를 카피하려고 했고, 

이런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했던 정교도들의 노력의 결산이 

17세기 중반 신학자 페트로 모힐라(Петро Могила) 주도하의 키예프 총대주교좌 복구와 

훗날 키예프-모힐라 아카데미의 전신이 된 키예프신학교 설립이었다.[15]


정리하자면 당시 우크라이나 정교회권 사회로의 가톨릭 폴란드 침투는 

1차원적인 식민지, 억압자의 구도가 아니라 

이런 변화 자체가 가능하게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미묘한 정교관계의 틀에서 봐야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는 계급간 차이가 강했지만 

적어도 귀족계급 내에선 동네 짜리 전반에서 나라 전반을 뒤흔들 대귀족까지 평등하게 시민권과 참정권을 누렸고, 

이런 귀족공화국의 시민권 중에는 종교의 자유도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성문화된 참정권을 누리는 지배계층만에게 한정된 종교의 자유는 

16세기 아우크스부르크 합의 이후에도 옆나라 신성로마제국에서 결국 무너졌듯이 

실제 적용의 영역에서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출신 귀족들의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어도, 

가톨릭계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막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피지배계층이 다수였던 현지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바르샤바, 빌뉴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자신들은 핍박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면 이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종교적 자유 덕분에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버티겠다는 정교회 귀족층은 

나름 위기의식을 느껴 경쟁적 모방에서 신학교 신설까지 적극적으로 정교회권의 반격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코사크 반란을 일으켰을 땐 

이런 정교회의 이념적, 교회 조직적 재정비가 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동슬라브 루스 민족의 정교회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니, 

일시적인 처우나 자치권, 봉급 문제로 빨리 반란을 일으켜 빨리 진압되었던 이전 시대의 코사크 반란과는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 우크라이나를 반쪽으로 쪼개버리고, 

연방 자체에도 동유럽의 패자 위상을 상실케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힌 동유럽판 30년 전쟁이라 부를만한 

규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일명 대홍수).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때 상실한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분할되어 멸망했다.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자카르파탸)[16]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2. 코사크 헤트만국

코사크는 흑해와 육로를 통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던 그 영광스러운 루스인과 동일한 민족이며, 

야벳의 자손들[17]이다. 

이들은 루스 군주인 올렉 공 시절 모녹실라 배를 타고 항해하며, 

바퀴가 달린 배를 이용해 해로와 육로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던 바로 그 군단과 같은 가문 출신이다. 

바로 이들이 루스의 신성한 군주 볼로디미르 대공 시절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를 정복했다. 


이들의 조상은 볼로디미르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6세기 키예프 시의 형제단과 정교회 성직자들이 

코사크의 지원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남긴 명문 폴란드인 귀족들과 루테니아인 농노들 사이의 종교갈등은 

폴란드에 재앙을 불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루테니아 지역의 영토를 잃어버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정교회 탄압과 이에 따른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반란 그리고 뒤이은 루스 차르국의 개입이었다.(대홍수 참조) 

원래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들은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폴란드 본토까지 보호해주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한 대가로 

반 독립적인 자치를 누렸고, 

코사크가 아니었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농노들도 타타르인들에게 납치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 것이 나을거라는 체념하에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시대착오적인 가톨릭 강요 및 착취와 폭정이 이어지자 

1648년 코사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대홍수라는 대전란이 발생하게 되었다.[18]


폴란드가 군대를 재정비해 반격에 나서자 

수세에 몰린 흐멜니츠키는 '신종'을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지원을 요청했고[19],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 가톨릭의 압제로부터 정교도들을 해방시킨다'라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으로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스웨덴 제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등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노리고 개입했으며, 

흐멜니츠키가 크림 타타르족 용병을 고용하면서 규모가 몇배로 커져 이른바 '대홍수'로 불리는 전쟁이 일어났다. 

흐멜니츠키가 급사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온갖 세력이 뒤엉킨 전쟁터가 되었고 

흐멜니츠키 반란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키예프는 처음 협상과는 다르게 결국 러시아로 넘어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상실하고, 

동시에 곡물을 수출하던 비스와 강 수운 체계가 박살나면서 국부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이후 크림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남부를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10여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동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가톨릭과 이교도 타타르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Cossacks osprey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된 루스 차르국의 지도자들은 코사크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이들은 코사크들의 평등한 공동체 문화가 모스크바 귀족들의 농노제에 위협이 될 거라는 판단하에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억압하고, 코사크 공동체에 농노제를 순차적으로 도입시켰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표트르 대제는 

코사크들을 징발하여 신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험한 노역과 군역을 강제했는데, 

요새 건설 등에 동원되었던 코사크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온 관리들이 밥도 잘 안주는 주제에 마구 때리고 갈궈서 

대게 2/3에서 1/6 정도가 파견나간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영웅으로 추앙받는 마제파가 

칼 12세를 믿고서 대북방전쟁때 스웨덴 제국편으로 참전하여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하에서 키예프 루스의 후손들이 몽골의 침략 이후 수백년만에 다시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크림 칸국의 침략과 폴란드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주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당연히 러시아어를 쓸 일도 없었고, 

서구식 민족주의를 배우며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보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가장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언어적 요인뿐만 아니라 종교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데,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었던 리비우 형제단이 신경이 쓰이자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 정교회 신자들이 하나로 모여 폴란드 가톨릭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만들었다. 

일부러 리비우 시의 정교회 신자들 중 일부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리비우 시내에서 다 쫒아내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거기에 폴란드는 브레스트 연합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교회를, 

전례는 정교회 양식이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등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재편하여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의 지배 아래로 귀속시켜 루테니아인들을 종교 문제로 서로 다투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서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려 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 영내의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는데 

1676년 폴란드 의회는 

정교회 신도들이 국외로 이주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이주해 오는 것, 

총대주교들과 교섭하여 종교적 문제의 결정권을 넘기는 것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사형이나 재산 몰수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폴란드 귀족들은 정교회 성직자 상당수를 압박하고 포섭한 것을 기반으로 

1708년을 전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 정교회는 동방 가톨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고, 

영내 남아있는 정교회 신도들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로, 

즉 명목상이나마 전부 동방 가톨릭 교파들로 개종시켰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는 

정교회 전례만 유지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교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뿌리박게 되었다.[20]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돈 코사크들을 삽질만 시킨 건 아니었다. 

제국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튀르크, 몽골, 퉁구스계 국가들을 정복하는데도 코사크들을 적극 활용하여 

시베리아를 향해 넓은 영토를 단기간 내에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시베리아와 쿠반 강에 있는 코사크인들의 정착지는 

아직도 옐로우 우크라이나, 그린 우크라이나 등 우크라이나 출신 이산민들이 주로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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