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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 4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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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6-06 13:50 View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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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근대 :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멸망시키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이 3차례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의 서남부 5주, 자카르파탸 일대[21]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 지역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어를 억압하고 러시아식 농노제를 도입했다. 

파벨 1세 재위 시기에는 우크라이나 남부로 농노제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평등사회에 기반을 둔 카자크 공동체는 붕괴되고 

귀족화된 카자크 지도자들이 농노 카자크들을 지배하는 러시아식 사회 구조가 정착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동부의 코사크들은 러시아 제국의 정예 기병대가 되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코사크 기병들은 카프카스와 투르키스탄, 시베리아 일대의 병영 도시에 이주 정착하게 된다.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일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방임 아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로 민속문학을 수집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간을 만들고 있었다. 

중세 폴란드 시절 교역의 중심지였던 리비우 시에는 리비우 형제단이라는 우크라이나인 상공인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어 인쇄물을 발간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였다. 

리비우 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 역할을 이어나갔다.


정작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의 처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가톨릭 교회임에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라틴 전례를 따르지 않는 이단이라면서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했으며 

폴란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모조리 쓸려나간 러시아의 폴란드인 지주들과 달리 

갈리치아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예전과 다를바 없이 이들을 착취했다. 

그들을 착취하는 폴란드인 지주들과 

빚으로 옭아매어 얼마 없는 땅까지 뺏어가는 유대인 대금업자들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오는 엄청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척박한 토지에 과도한 인구, 거의 없다시피한 교육 수준, 원시적인 수준의 영농기술,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지주들과 오스트리아 당국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기근과 영양결핍과 열약한 환경으로 인해 만연한 질병, 

또다시 그로 인해 저하된 농업 생산성이 다시 기근을 불러일으키는 등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곳으로 

대영제국한테 쥐어짜이는 그 아일랜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갈리치아의 폴란드계 유력인사였던 Stanisław Sczepanowski는 

갈리치아의 현실을 고발한 자신의 저서에 

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음식은 절반 밖에 못 먹으며 일은 1/4 밖에 하지 못 한다고 기록을 남겼고 

결국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리비우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나 오스트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 

멀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브라질 등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차별한 건 아니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그나마 직접적인 탄압이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로 피신하여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지방의 경제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이 장악당하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기근과 과잉 인구에 시달리며 리비우 시에 빈민가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빈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이 없어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사상을 키워나갔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이주해오고 러시아식 농노제와 군사 문화가 뿌리내리는 동안,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들과 영향을 키배로 주고받으며 

서유럽과 중부유럽의 사상과 문화가 급속도로 뿌리내렸다.


6.1. 러시아 영내 우크라이나의 발전[편집]

러시아 정부의 검열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 영내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완전히 사멸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러시아인 귀족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농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역사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스토마로프(1814~1870)를 들 수 있다. 

19세기 우크라이나 문화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하르키우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러시아 제국 정부가 신설한 키이우 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되었다. 


코스토마로프는 

1847년 타라스 셰우첸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같이 유형을 갔다왔던 셰우첸코는 유형 이후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코스토마로프는 학계로 복귀하는데 성공하였고 186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기면서, 

남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과 북부 러시아인(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보흐단 흐멜니츠키 전기 및 자포로제 코사크에 대한 연구 덕분에 

재차 유형에 처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드네프로 강 유역 흑토지대는 토양이 무척 비옥했기 때문에 

여타 척박한 러시아의 다른 지방들과는 다르게 소출이 많았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잉여 식량을 영국으로 수출한 후 

그 돈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귀족들이 좋아하는 위스키와 맥주, 여타 사치품을 직수했다. 

이러한 연유로 19세기까지 러시아의 북부 지역의 농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세 서유럽과 비슷한 형태로 개선되어간 반면 

러시아의 영토가 된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민의 노동력을 최대한 봉건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착취하는 방향으로 악화되어 갔다. 


러시아 북부 페름 등지의 경우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이 적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겨울에 직접 가구를 제작해서 판매하거나 혹은 시내에 공장에 취직하여 공장에서 받은 급여로 

소작료를 대신 지불하고, 

지주 귀족이 농노들의 공장 일자리를 대신 알아봐서 주선해주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이는 북부 지역 농민들이 남부 지역 농민들보다 문해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는 이유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서 우크라이나 지역 농민들의 평균 생활수준은 북부 페름 지역 등등의 농민들의 그것보다 더 비참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영토 우크라이나 지역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농노해방령이 시행되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우크라이나 농부들에게는 비교적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22]


우크라이나 지방에 살던 농민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긴 했지만 어떻게 대응할 힘이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항의하는 대신에 애들을 무작정 덮어놓고 많이 낳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농촌 공동체 미르는 각 가정의 인원수대로 땅을 분배했는데, 

이때 애가 한명이라도 더 많으면 더 많은 비율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침략과 크림 타타르의 노략질 때문에 좀처럼 증가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인구는 

이때 비로소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6.2. 우크라이나발 대량 이민[편집]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가난한 농업지대에 총알받이용 병력공급 지역 쯤으로 여겼으며, 

갈리치아는 빈곤문제가 심각해지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치아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있을 턱도 없고 

그 때문에 농업이민을 선호한데다, 

차라리 춥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폴란드계나 유대계, 독일계랑 부딪힐 일이 적은

캐나다로 이민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 갈리치아 지역의 빈곤은 19세기 후반에 특히 극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들이 비옥한 흑토 지대인 것과 다르게 비교적 척박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갈리치아 지역 주민의 소득증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식량 생산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해당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편입되고 중부-동부 지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전통적인 무역로마저 단절되었고 

설상가상 별다른 공업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자 

도시에서도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른 지역 농민들보다 두 배 적게 먹는 대신 

낙후된 농업 기술과 허약한 건강상태로 4분의 1 정도의 효율로 일하며, 

농업 이외에 주 산업은 주류 양조 산업으로 농촌 내 알콜 중독이 만연하였다. 

절망적이고 빈곤한 사회 분위기 속에 우크라이나계 농민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5% 정도로 

당시 오스트리아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서구 세계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유명하다면 

중유럽에서는 이른바 "갈리치아의 빈곤"이 기근의 대명사로 통했을 정도였다. 

영양실조로 연간 5만여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23]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가정 상당수는 이웃 폴란드인 농민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대량 이민을 결정하였다. 

갈리치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브라질로 이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은 이민 온 지 4~5세대가 지났지만,

 이른바 “콜로니”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르와 어느정도 흡사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서, 

밀과 쌀, 콩을 재배해 판매하고, 

이 외에도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먹던 호밀과 메밀 등을 경작한다. 

이들 상당수는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재침례파 공동체 못지 않게 출산율이 높고, 또한 배타성이 강해 

우크라이나계 외 다른 (로마 가톨릭을 믿는) 브라질인들을 걍 다 쵸르니(우크라이나어로 흑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사는 시골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어의 갈리치아(할리치) 방언이 많이 통용된다고 한다.[24]


오스트리아령 우크라이나에서는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해외 이민을 갔다면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대인들이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이민가는 경우가 흔했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당시 주어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대폭 축소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대신 유대인들의 이민 비자는 쉽게 내주는 편이었다.[25] 

이러한 연유로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경우는 캐나다의 경우와 다르게 유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니네 동네에는 그의 아버지의 추종자들, 즉 칙칙한 옷을 입은 러시아 하시드파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관습과 인식은 그들이 버려두고 온 땅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사모바르에 차를 끓였고, 각설탕을 입에 물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먹었으며, 때로는 러시아어 때로는 이디시어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 / 체임 포톡 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지역은 근세 유대교 하시딤파의 본산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미국인들은 이들을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취급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은 포그롬을 피해 이주한 경우이니만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는 척을 진 상황이었다. 

미국 유대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지만, 

이들에게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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