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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 5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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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6-06 14:09 View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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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현대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화에 휘말렸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오스트리아에, 나머지는 러시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1차대전에서 서로 적과 적으로 싸워야 했다.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면서 독일에게 유리하게 국경선을 내준 후 휴전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공중분해되었다.(민족자결주의 참조)


이렇게 러시아가 휘청이는 사이 우크라이나에도 다시 독립국가가 들어설 뻔 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의 괴뢰정부인 우크라이나국이 들어서지만 

곧 독일제국이 패망한 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네스토르 마흐노가 설치한 자유지구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독립하는 그 순간부터 

서우크라이나의 지배에 반발하는 폴란드인들의 봉기와, 

이에 호응하여 개입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침공에 맞서 싸워야 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침공을 당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1919년1월 통일을 선언했으나 

수도 키예프는 2월5일 붉은 군대에 함락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영역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남서부 일대로 축소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점령지에는 1월6일 선포된 괴뢰국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설치되었다. 

1919년초 데니킨의 백군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반격을 가하자 

3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반격하여 한때 키예프 인근으로 진출했지만,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을 받아 1920년 초에 이르면서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일대로 영역이 쪼그라들게 된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1920년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하고 그해 5월에 키예프를 탈환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 여겼고, 

폴란드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야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원래는 벨라루스 일대의 국경충돌에 불과했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정면대결하는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전쟁 끝에 러시아와 폴란드는 1921년3월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할했다.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은 소련의 한 구성국이 된다. 

 

이 와중에도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계속 내전을 벌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 관할 지역인 극동을 우크라이나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서 참고. 


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대부분은 러시아인 정체성으로 동화됐지만, 

현재도 연해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식으로 '~엔코'로 끝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랐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체를 부정하고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러시아 자국의 불가분의 일부이자 변방의 하나 생명선?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푸틴도 마찬가지. 


이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에 우크라이나 지방을 부르는 이름이, 

자국인 '大러시아와 대비되는 '小러시아'라는 뜻인 말로로시야(Малороссия)였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말로로시야라는 단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으며 

혁명, 내전, 독재, 탄압, 집단 아사,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20세기의 상처 때문에 

현대에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말로로시야인'이라고 발언하는 행위는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7.2. 소련의 통치

소련 치세에서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는데,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다. 

바로 1932년~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26]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반러감정의 직접적인 연원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집단농장화 정책을 펼 때 가장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는데[27] 

기근의 피해가 유독 바로 그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으니, 

일부러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작정하고 굶겨죽였다고 의심할 만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러시아로 이주해온 광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한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키면서 

1921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편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벌였다. 

폴란드인은 폴란드 정부에서 동화를 강요했으므로, 유대인은 경제의 대지분을 차지했으므로 불만을 가졌다. 

이후 독소전쟁으로 독일이 전전의 폴란드 동부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해당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협력하여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적극 동참했다.


유대인들이 싸그리 절멸당한 후에는 

1943년 봄부터 600년가량 함께 살아오던 볼히니아와 갈리치아 일대의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벌였다[28] 

여기에다가 전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전에 40%에 이르던 폴란드인이 싸그리 현 폴란드 영내로 이주되면서 

결과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전체 국토에서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물론 서부인들은 이런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을 개전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를 설립하자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으나,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를 강제해산하였고, 

수탈과 기아, 민간인 학살 등이 나오자 반독으로 돌아선다. 


전쟁 기간 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로 

독일과 소련 양쪽에게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전사자 포함, 약 7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29] 

이후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우크라이나 국민위원회가 다시 독립을 따내지만, 명목상의 독립이었고, 

우크라이나는 스테판 반데라를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벌였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은 소련에 철저히 격파 분쇄되고 소련에 재점령되었다.


7.2.1. 현대 우크라이나의 형성

우선 소련 연방 초창기, 블라디미르 레닌이 

오데사를 포함해서 러시아가 차지했던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을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줬다.


2차 대전 뒤 연합국의 대지분을 보유한 소련은 

폴란드의 항의에도 1939년 병탄한 폴란드령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했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할양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 별로 명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도 영 아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5개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의 88%로 압도적으로 많다

(단 리비우[30][31]는 전쟁 전에는 폴란드계가 전체 시민의 2/3을 차지하긴 했다).


폴란드 영토에다가 종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인데도 왜 반폴란드 성향이 강하냐면, 

이 동네 일대가 2차대전 이후 영토, 인구 교환 때 까지 

지주, 귀족 등 상류층은 폴란드인,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현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농노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리비우에 살던 폴란드인들은 2차대전 이후 대부분 현재의 폴란드 영역으로 쫓겨났고, 

남아있는 폴란드계 숫자는 타 지역보다 많지만 그게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원래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이다.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우시크[32], 자카르파탸, 체르니우치)는 

1939년, 또는 1945년까지 러시아/소련 땅이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33]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히 외부세력일 뿐이다.


반대로 몰도바 남쪽의 해안지대인 부자크는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영역이 되었다.[34]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1954년에 우크라이나 출신자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반도를 러시아에게 받는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110만명을 차지한다.[35]


이렇게 당시 소련시절에서 영토를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줬던 이유는 단순한데 

우선 우크라이나 주변의 땅이니깐 행정편의상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 줬고, 

그리고 어차피 소련이라는 체재가 하나의 체제니깐 

러시아의 관할 구역을 우크라이나의 관할구역으로 넘겼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Ukraine-growth

우크라이나라는 민족적 개념은 폴란드와 러시아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성장했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지역마다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키예프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우(제2도시)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이질감이 상당히 심한 반러시아(반러) 성향인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에 대한 이질감이 적은 친러시아(친러) 성향인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구성을 보면 

크림 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 

2014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하르키우도 

우크라이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이 동부에 꽤 있지만 

그건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크라이나 동부-서부의 다른 역사는 이후 큰 갈등의 씨앗이 된다.


서쪽에 있는 독일, 폴란드와 일단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부를 집어삼키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들 땅이라고 여기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다. 

대신에 폴란드는 이미 소련 지배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를 세계에서 최초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이후 지금의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했기에 

여기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보다는 갈등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전후에 서우크라이나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죄다 현 폴란드 영내로 강제이주되었기에 

동부 우크라이나나 크림반도처럼 민족자결주의 같은 주장으로 반란을 일으킬 껀덕지도 없다.


독일 또한 악랄한 소련과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준 구원자들인 줄 알았더니 

소련놈들보다 더한 학살을 저지르고 간 일이 있어 전혀 좋게 보지는 않는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와는 사이가 영 나쁜데 

벨라루스가 과거 키예프 공국으로 같은 동족이면서도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인 편이며 

현재도 친러이기 때문.[36] 


둘이 과거 키예프 공국 이야길 하며 서로를 옛 우리땅이라 까고,[37] 

벨라루스는 친러 성향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쁘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시절 벨라루스에 부득이하게 체르노빌산 낙진을 선물해줌으로써 빅엿을 먹여준 적이 있다.


7.3. 소련 붕괴와 독립

1991년에 소련에서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틈을 타서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해체한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는 다시 1991년 독립국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녹록하지 못했고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초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 등에 시달려야 했다. 

1995년 대선에서 쿠츠마가 집권하면서 경제난은 진정되고 그제서야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부패문제는 여전하였고, 결국 집권 말기에 민심을 잃는다. 


이 와중에 야누코비치와 유셴코간의 대결로 대선이 치러졌는데 

친러세력이 야누코비치가 당선을 우려하며 대대적으로 투표조작을 시전한 덕택에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친서방 정권하에서도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고 

내분까지 겹쳐 2010년 대선에서 친러정권이 들어섰지만 

친러정권도 딱히 나은 것은 아니라 지지를 상실해가다 

국민들이 다시 유로마이단을 일으켜 부패한 친러정권은 축출되었다.


2010년대와 2020년대에 걸쳐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점점 위기를 맞고 있다. 

유로마이단 이후의 문제들로 인하여 후유증을 겪고 있다. 

친러 또는 러시아계 출신들이나 러시아인이 많았던 크림반도는 

2014년,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되었고 다시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친러 시위, 유로마이단 반대세력은 결국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었던 지역감정 때문에 

분리독립을 선언하여 노보로시야 연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분리주의 내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제전으로 변하고 만다. 

포로셴코에 이어 젤렌스키 정권 또한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EU 및 나토 가입 지향 행보를 이어가자 

러시아가 격렬하게 반발하여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계속해서 위협하였고, 

기어이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받게되어 위기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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