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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 6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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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6-06 14:24 View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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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네스트르 강하구에 티라, 드니프로 강하구에 올비아, 오늘날 세바스토폴에 해당하는 케르손네소스, 

테오도시아, 판티카파이온, 파나고니아, 오늘날 로스토프에 해당하는 타나이스

[2] 일례로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는 

주인공이 그리스인에게 납치된 스키타이인으로 설정되며, 올비아의 그리스 대상인에게 팔려갈 뻔한다.

[3] 이미 볼로디미르 1세 시절부터 폴란드와 영토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4] 13세기 키예프 루스의 인구는 600~8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5] 키예프 루스는 여러모로 동슬라브 3개 나라의 공동역사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 고유의 독립국가로서는 이 나라가 최초라는 것이다.

[6] 헝가리가 갈리치아의 영토를 일부 떼어간 덕택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는 오늘날에도 Rusyns인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이 남아 있다. 

헝가리 국왕의 짧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지배는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건설로 이어졌다.

[7] 중세에 '왕'이라는 직함은 교황만이 공인할 수 있는 것으로, 

다닐로가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은 것은 루테니아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였다.

[8]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동부에 해당하는 지방을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9]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일대를 정복하고 나서 14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로 개종했다.

[10] 리투아니아인들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과는 별개로 

리투아니아 본토는 튜튼 기사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었다.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인들과 힘을 합쳐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대패시키고 나서야 리투아니아 본토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11] 이반 4세가 광기에 물들어 혼란에 빠진 와중에 

크림 칸국에서 모스크바를 쳐들어가 10만명에 달하는 처녀들을 노예로 납치한 일도 있었다.

[12] 보통 노예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젊은 여성들을 주로 납치해 수레에 실어가고, 

아이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

[13] 오늘날 크림 타타르인의 직계 조상들이다. 

그들은 중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민들을 학살하고 납치하여 노예시장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4] 이런 유대인 농민들은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에 비해서 훨씬 조세부담이 적은 편이었다.

[15]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폴리투의 정교회학교는 교회 슬라브어를 중심으로 한 12~13세기 교육 커리큘럼을 수백년간 그대로 유지했으나, 

키예프 신학교 설립 등을 필두로 교육이 크게 개선되었다.

[16] 갈리치아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 편입되었고,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는 동슬라브계 루신인이 다수인 지역이었지만 

10세기 이래로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며, 동슬라브계 국가의 영토였던 적이 없었다. 

자카르파탸가 애초에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된 것도 1945년 이후의 일이다.

[17]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폴란드인 귀족들은 

자신들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자손이며,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은 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야벳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18]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학교를 마친 이후 키예프의 가톨릭 예수회학교를 다녔지만, 

철저한 정교회 신봉자였다. 

우크라이나어, 중세 루테니아어, 교회 슬라브어, 폴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고, 

이런 지식 덕분에 그는 코사크 부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친폴란드적인 인물이었다.

[19] 1654년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 루스 차르국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했는데 

페레야슬라우 조약의 결과 

코사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및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존속 등을 받아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 및 외교권의 박탈을 대가로 치뤘다.

[20] 훗날 그리스 가톨릭 교회들은 

소련이 우크라이나 서부를 합병한 이후 친서방 세력으로 분류되어 당국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21] 이 지역들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

[22]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얻은 지역은 바로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 농노들이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 지주들을 제거하고자 

농노 해방령 당시에 폴란드 지주들에게는 아주 약간의 보상만이 주어졌다고 한다.

[23] 기근과 알코올 중독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콜레라, 발진티푸스, 천연두 및 매독이 창궐해서 해당 지역의 평균 수명을 크게 낮추었다.

[24] 브라질의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에는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들이 30만여명 정도 거주하는데, 

이들은 시기적으로 브라질계보다 이민 역사가 늦고 

종교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아니라 정교회 출신이었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정교회를 믿은 많은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루신인 소수민족 인구가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가 폴란드 제2공화국 내의 차별을 피해 

1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유럽계 이민을 환영하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중 절반이 정교회 신도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처럼 폐쇄적인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현지 아르헨티나인들과 동화되었다.

[25] 당시 러시아제국의 상업망은 이미 독일인들이 장악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뒤를 잇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인구가 빠져나가더라도 당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26] 적백내전 당시인 1921년~1922년에도 이미 1차례 대기근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대기근의 원인과 결과 논란은 문서 참고.

[27]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소출이 많아서 농부들이 절대 땅을 안 내놓으려고 했고, 

카자흐스탄은 그 당시에도 유목사회 전통이 강했다.

[28] 폴란드를 비롯한 외국 사학계는 대개 10만명 전후로 추산하고 있다.

[29] 이런 독일의 우크라이나 천시는 독소전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적받는다.

[30] 폴란드식 이름으로는 르부프. 공작의 아들 '레오(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이라서 

라틴어로는 레오폴리스라고 했던 도시다. 

안 그래도 독일어로 뢰베Löwe가 사자인데, 정작 독일에서는 렘베르크(Lemberg)라고 한다.


[31] 반폴란드, 반러시아 성향을 가진 극우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

[32] 옛 이름은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의 이름을 딴 스타니슬라비우였으며, 

1962년에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33] 리비브, 이바노프란키브스크 같은 경우는 도시로서의 기원이 중세 폴란드 왕국이 세운 도시들이었다. 

이 동네는 그 이후로 줄곧 도시 외곽의 농촌은 우크라이나인 절대 다수였던 반면, 

시내의 전문직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폴란드인들이 양분하며 공존했으며, 

19세기에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의 핵심적인 활동거점이었다.

[34] 몰다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고, 이후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초기 독립 상태에서 이 해안 지역을 나중에 차지한 셈이라 반드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민족구성을 따지더라도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일부였다가 소련이 병합했다.

[35] 크림반도는 2014년에 크림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벗어나고 러시아에 도로 편입된다.

[36] 표트르 대제가 코사크들을 탄압한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시초인데, 

벨라루스는 일단 코사크들이 몰려살던 구역이 아니었다. 

1863년 농노해방 때도 벨라루스 농노들은 

러시아제국에서 폴란드인 지주들을 몰락시킬 목적으로 가장 적은 토지세와 이자를 납부하면 되었던 반면,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의 많은 소출 때문에 가장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

[37] 한때는 폴로츠크 공국과 키예프 공국이 서로 치고 받던 사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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