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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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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4해22-03-29 07:03 View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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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2]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돌렸다

악을 악으로 갚은 2차대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2.03.29 03:00


1941년6월, 

히틀러는 2년 전에 스탈린과 체결했던 독·소불가침조약을 위반하고 180만 대군을 투입하여 소련을 기습했다. 

그렇지만 두달 안에 승리를 거둔다는 원래의 계획은 소련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좌초했다. 

1942년11월 이후 소련군이 대반격을 가했다. 

소련 영토를 완전히 회복한 후 동유럽 지역을 넘어 1945년4월 베를린으로 진격하였고 

5월8일 나치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에서 大祖國戰爭이라 부르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과정에서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인명손실을 개의치 않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독일로 진입한 소련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병사들은 제때 보급이 이뤄지지 않아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이들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사진은 1945년 폐허가 된 베를린 의사당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소련군이 赤旗를 들고 있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독일군에 비해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인 소련군이 승리를 거둔 것은 인명손실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다. 

소련군과 처음 조우한 미군은 소련군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넝마와 같은 군복을 입었으며, 몇몇은 사복 차림에 군복을 반쯤 섞어 입었다. 

철모를 쓴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은 짚 더미가 깔린 마차에서 잤으며, 몇몇은 말을 타고 졸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때까지도 보급과 정찰을 말에 의존했고, 야포도 말이 견인하고 있었다. 

보급 행렬은 살아있는 돼지와 닭이 가득 찬 수레로 이루어졌다. 

그나마 제때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흔히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한 미군은 소련군이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야만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상태로 독일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며 2천㎞ 이상 걸어서 베를린까지 이동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연대는 몇 차례나 ‘갈아엎었다.’ 

즉, 많은 병사가 죽으면 신병으로 재편성하고 다시 와해되면 또 재편성하기를 거듭한 것이다.


소련군이 지뢰밭을 통과하는 방식을 주코프 원수가 설명해 주자 아이젠하워 장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련군 병사들은 “마치 지뢰가 없는 것처럼 전진”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인지뢰에 의한 희생이나 포격 혹은 기관총 사격에 의한 희생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소련군의 인명손실은 미군에 비해 적어도 다섯배 이상이었다. 


소련군 장성들은 미군이나 영국군 장성들이 그들이 거둔 전과를 자랑할 때 코웃음을 쳤다. 

몽고메리 원수 휘하 영국군 부대가 롬멜 장군의 독일군 부대와 엘알라메인 전투를 벌였을 때 

양측은 병력 40만명과 전차 1500대를 동원했고 사상자 4만5천명이 발생했다. 

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양측 병력 210만명, 전차 2천대가 동원되어 190만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런 피해를 당하며 독일로 진격해 왔을 때 소련군의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독일인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환상적으로 잘살았다. 

식량창고에는 훈제고기, 말린과일, 딸기잼 같은 게 가득했다. 

이렇게 잘사는 민족이 왜 가난한 소련에 쳐들어와서 집과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단 말인가. 

부러움은 곧 분노로 변했다. 

소련군은 독일 마을에 들어오면 일단 집 안의 가구나 식기 같은 것들을 마당에 던져서 부수는 일부터 했다. 

이어서 남은 물건들을 철저히 약탈했다. 


소련군은 보급과 정찰 수단으로 말을 주로 사용했다. 

사진은 1945년5월 마차와 트럭을 탄 소련군이 베를린 도심에 진입한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1944년 12월 스탈린의 지시는 사실상 약탈 권유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일반 병사들은 매월 5㎏까지, 장교들은 10㎏까지, 장성들은 16㎏까지 가족들에게 짐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소련군 선전전문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디에서든 약탈이 자행됐다. 

studebaker(미국이 소련군에 제공한 트럭)에는 지붕까지 약탈품이 가득 찼다. 

여자들은 겁탈당했다. 원시적 폭력이 규율의 모든 제약을 찢어버렸다.

모든 건물이 불타오르고 연기와 재로 어두워졌다. 

벽이 무너지며 사람들을 깔아뭉개도 병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종군기자로 소련군 신문에 많은 칼럼을 게재한 문필가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병사들을 충동하는 글을 썼다. 

“날짜를 세지도 말고, 거리를 헤아리지도 말라. 그저 네가 죽인 독일인의 수만 세라. 어떤 자비도 베풀지 마라.” 

많은 병사가 그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청교도적 인물로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는 

스탈린을 만났을 때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항의했다. 

스탈린은 뜬금없이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했다. 

“도스토옙스키 읽어보셨죠?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한 남자가 전우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체를 넘으며 

스탈린그라드부터 베오그라드까지 수천㎞를 계속 싸우면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행동하겠소?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여자와 재미 좀 보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하겠소? 

소련군이 이상적인 건 아니오. 가장 중요한 건 독일군과 잘 싸우는 일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소.”


지도자의 정신 자세부터 이 모양이니 병사들이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 게 당연했다. 

술에 취한 병사들의 야만적 행태를 장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후 연구결과에 의하면 독일여성 200만명이 성폭행당했고, 수십만명이 자살했다. 

동프로이센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1945년에 칼리닌그라드로 개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5년4월 소련군이 인근 주류공장을 습격한 후 완전히 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병원에 들어와서 

의사, 간호사, 환자 할 것 없이 모든 여성을 성폭행했다. 

일부 여성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폭행당했고, 차라리 총으로 쏴달라고 애원했다. 

베를린에 진군한 이후 시기는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소련군이 ‘Frau, komm. (아가씨, 이리 와)’ 하는 끔찍한 명령을 하면 지옥문이 열렸다.


독일군의 피해도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에서 훨씬 컸다. 

1945년1~5월 독일 본토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죽은 독일군 병사 120만명 중 적어도 80만명이 소련군에게 죽었다.

소련 측 분석에 의하면 

독일병사들은 미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투항하려 하고 소련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저항했다. 

병사나 민간인이나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미군이 독일마을에 들어가면 

마을주민들은 “소련군이 오나요?” 하고 두려움에 떨며 물었고, 여자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련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썼다. 

독일에 진군한 연합군 중 최전선에서 정찰 임무를 하던 미군 중위 코체뷰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잡히지 않고 미군에게 항복하려는 독일군들이 계속 달려들어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소대 36명이 독일군 355명을 무장해제했는데, 다른 독일 부상병 100명을 또 넘겨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란민들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으로 향했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갔다.


소련군이 왜 그런 악행을 저질렀는지 짐작 못 하는 바가 아니다. 

소련군 800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민간인 희생자도 1600만명에 달한다. 

이런 가공할 피해를 입힌 적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왜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군을 죽인 숫자로 보면 소련군이 서방 측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렇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은 살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전후에 독일,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의 신뢰를 얻는 데에 소련은 실패했다. 

2차대전 이후 거의 80년 만에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리야 예렌부르크(1891~1967)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 유대인 문필가다. 

파리로 망명하여 몇권의 시집과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을 쓰던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 신문 ‘赤軍’의 종군기자로서 2천편이 넘는 기사와 에세이를 썼다. 

독일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그의 글은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쓴 소책자 ‘죽여라’에서는 이렇게 썼다. 

“독일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말하지 않겠다. 대신 죽이겠다. 

하루에 독일 놈 하나도 못 죽이면 그날을 허비한 것이다. 

한 놈을 죽였으면 또 죽여라. 독일 놈 시체 더미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소련군이 독일로 진격해 들어간 이후 그의 글은 더 독해졌다. 

“독일 도시가 불타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독일, 너는 이제 포위되어 불타며 죽음의 고통 속에 신음한다. 복수의 시간이 왔다.” 


후일 그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을 부추긴 게 아니라 오직 나치들을 처치하라는 의미였다고 변명했으나, 

병사들은 민간인 학살을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글이 나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정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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