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대생의 실습과 청년 해기사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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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대생의 실습과 청년 해기사의 추억 -
양진국 (N26)
11. 아침상(床)에 우짜다가 계란찜이 올랐다.
5형제가 뜨거운 걸 핑계로 눈치만 보는데 장남인 내가 "자 먹자!"' 하고 숟가락을 대자
동작 빠른 선착순도 없이 순식간에 양재기 바닥이 드러났다.
1971년 12월말 50년 전, 어느 겨울 아침식사 풍경이었다.
지금이사 서민식당에서도 찬그릇 수로 구색 맞추기에 흔한 반찬이지만
선친께서 본학 1기 졸업생에 선장도 하셨고
그 당시 천경해운 전무이셨으니 남 보기엔 제법 부잣집이었음직 함에도 그 정도니
우리들 청년시절의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그 다음 날, 일본 Sanko-Line의 Car-Bulker 선에 실항사(A/O)로 승선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점심에 삼계탕이 나왔는데, 세~상에~ 한 사람에게 한 마리씩이나..
난생 처음 먹어보는 삼계탕에다 독차지라, 속으로 '우와~ 배 타는 거 좋은 거네..'
22. 승선한 선박이 일본 Yokohama항을 출항하여 태평양에 접어들자 제일 먼저 익힌 것이
수동조타로 침로를 30도쯤 좌/우로 변경했다가 원침로로 복귀하는 감을 잡는 것이였다.
약 14일 항해 후 기항지가 Canada Vancouver항,
그곳에서 곡물을 만재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일본 Kobe항으로 가는 항해가 시작되고,
출항 하루 후, 저녁식사 시간에 교대하러 Bridge로 올라온 3항사를 억지로 내려 보내고는
조타기를 35도 최대각으로 Hard St'bd로 돌렸다.
약 4만톤의 곡물을 만재한 선박이 비스듬히 기울면서 선수가 회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기장 1항사 고급사관 모두와 3항사 당직타수 모두 Bridge로 들이닥쳤다.
"아뿌야, 아뿌야 니, 니 와이라노? 지금 뭐하는 거고?!"
"네, 한 바퀴 회전하는데 몇 분 걸리는지 시간을 재봤습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후, "그래 우찌 됐노?" "네, 3분30초 정도 걸렸습니다."
항해중인 배가 식탁 위의 식기가 움직일만치 갑자기 비스듬히 기울면서
기관실에서는 Steering Gear Alarm이 울려 난리가 났던 것이다.
수동조타로 변침과 침로복귀만 할 줄 알았지
Steering Gear에 갑작스레 걸리는 Load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와 협수로 통항 중과 출입항 중엔
Steering Gear Motor를 두 대 병렬운전해야 하는 것 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 날부터 일본에 도착하는 날까지 약 2주간 매일 기관장님께 반성문을 제출했다.
덕분에 Steering Gear의 구조, 전기/유압 회로, 유압용 Oil까지 공부하여 반성문을 채웠다.
배를 떠난 지 35년이 된 지금도 일선 선장들이 항해사들이 조선을 하는데
선수를 몇 도 회두하는데 몇 분초 걸리는지 감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아들이 승선 차 출국할 때마다 그것부터 파악하라는 게 출국인사다.
아무리 큰 대형선이라도 자전거 타듯 제 몸처럼 움직여야 하니까
기술자 해기사로서의 후배를 보는 일종의 노파심이다.
근데 뱃놈은 다용도 잡놈(MPP)이라도 되는 듯이 준비 없이 임기웅변을 때우기가 예사다.
(뱃놈과 선원/뱃사람은 어감도 질도 급도 다르다.
뱃놈은 직업의 종류도 비하도 아니고, Seamanship이 심신에 밴 전문해기사의 애칭이다.
배,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월급 타려 배를 탄다는 것은 재미없을 것 같다.
여담으로, 옛부터 강자나 두려움의 대상에게는 '놈'을 붙인다. 미국놈, 중국놈, 일본놈
또, 남을 추겨 올려세움으로 겸손의 자만에 빠지거나 자신이 덩달아 더 올라가고 싶을 때
즉, 약자나 낮춤의 비교대상에게는 사람 또는 人을 붙인다. 북한사람 대만인 흑인 장애인)
33. 2학년2학기말 시험에서 윤여정 교수님의 천문항해 학점을 못 받아 재시험을 쳤다.
그게 원한이 되어 실습 중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이 천측선위 구하기였다.
별 4개를 잡고 위치선 3개를 Floating Sheet에 작도해내는데 5분이 채 안 걸렸다.
망망대해에서 5분 만에 구한 선위, 선속과 Drifting으로 침로를 수정하는 뿌듯한 기분..
실습을 끝내고 4학년 개학해서 그 천측계산공책을 윤여정 교수님께 재듯이 제출했다.
요즘 항해사는 GPS 때문에 하늘과 별 바람과 파도를 보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44. 또 자신 있는 과목이 산적화물 선적후와 양하전의 Draft에 의한 화물량 계산이었다.
Double M/M Draft에 해수비중까지 보정한 기준 Displacement와
이것저것 공제할 출입항 ship condition report를 cargo surveyor에게 제시하고
매일 하는 계산에서 우물쭈물하는 Surveyor를 딱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전자계산기가 없었으니
앞뒤로 회전시켜 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돌리는 기계식 계산기로 계산 속도를 자랑했다.
훗날, 전수과 출신 2항사, 해군 출신 3항사와 measuring surveyor가
일사천리로 파악, 계산 방식/순서에 따라 기입할 수 있도록 화물량 계산 양식표를 만들었다.
Draft -> Displacement에서부터 Lightship과 각종 공제항목을 대입할 칸을 세분화해서..
55. 박남건(16기) 1항사님께 무슨 질문만 드리면,
"본과생이 그것도 몰라? 이리와!" 하시면서 벌주듯 귀밑머리를 잡아 뜯으시는 것이 싫어
가지고 간 전공과목 교과서를 몇 번씩 통독했고, 훗날 그 밑천으로 갑장(1급)시험까지 쳤다.
그 선배님께는 해대생의 Pride만 배운 것 같다.
66. 점심식후엔 한 시간씩 약 3개월간 윤명혁(12기) 기관장님 집무실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실기사(A/E)와 나란히 앉아 소리 내어 읽기와 해석하기 식으로,
그 공부가 밑천이 되어 별도의 추가 공부가 없었는데도
그 15년 후 육상근무를 하면서 일본선사 직원들과 용감하게 일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학공부는 무슨 공부라도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기초교양을 쌓는 과정일 것이다.
또 자전거 타기나 수영처럼 어릴 때 해본 것은
공부든 운동이든 취미생활이든 필요하면 언제든 쉽게 다시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77. 실습 중엔 1항사 아침당직 후 Daywork에 참가하여 Coffee Break까지 약 2시간을 일했다.
또 오후에는 수시로 기관부 Daywork를 참관했다.
그런 손발로 눈으로 익힌 경험들이 정식 선상근무에 까지 연장되어
웬만한 선상작업은 공수계산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또 회사에 월보하는 선용금, 주부식, 문화비와 Bond Store 관련 장부정리를 자청했다.
실습 후 하선할 땐, 통신국장께 부탁하여 과거 몇개월치 발수신 전보문을 갖고 하선하였다.
그 당시의 선박 전보는
한 단어씩 계산하는 통신비를 절감하기 위해 짧은 문장을 구사하고 약어를 동원하였다.
예> in spite of (3자) -> Despite (1자), as soon as possible (4자) -> soonest (1자)
하선할 때의 기분은 1항사도 시켜만 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금의 일선 선장들은 갓 졸업한 3항사가 배승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이 스스로 당당히 진급을 요구하는데 까지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까?
88. 1976년 봄, 해군 복무에서 전역하여 바로 2항사로 승선근무했다.
해군 전역 시 중위 2호봉 첫 급여가 약 2만 5천원?,
해외취업선 2항사로 승선하니 첫 급여가 약 45만원?
불가 두 달이 채 안되어 급여가 얼추 20배 차이였다.
인생 3대 불행이 '소년급제, 중년망처, 노년빈곤'이라 하는데,
이 경우가 예정된 자수성가를 시작하는 그 소년급제 급이었다.
더욱이 그 때는 해기사 절대부족 시대였고, 무엇보다 갑작스런 20배 차이의 급여가
진급과 출세를 위해 더 공부하고 상급자에게 잘 보이려 노력할 겸손할 필요도 못 느꼈고
재능/능력 개발과 욕심/포부를 키울 방향감각과 의욕을 상실케 했으니
해군장교+해대 출신이란 무경쟁 간판이
그 빛나고 아까운 청춘을 겁 없는 시건방진 안이한 소인배로 몰락시킨 결과가 되었다.
(특별한 노력과 인고 없이 얼떨결에 졸지에 부자 된)졸부가
방향 방법 철학이 없어 관련사회에 기여하거나 존경받는 일이 별로 없는 것과 비슷했다.
사업가가 용돈과 시간에 여유롭다는 것은 그 회사가 내리막길로 가는 징조와 비슷했다.
원리금변제-재투자와 자금 조직 영업 기술 정보 교육 안전 등의 관리에 바빠야 하니까.
그 와중에, (국민들이 망각하고 싶은 이승만 교육화대통령, 박정의 산업화대통령 덕분에)
국내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물가와 육상 임금은 급격히 동반상승했으니
그 당시(70년대 중반~80년대 초반) 배 2년 타면 집 살 수 있는 고임금으로
웃고 즐기고 재다가 정신 차리니 실속 없이 망한 세대였다.
그리고 무식한 만큼 거침없이 용감한 걸 뽐낸 청년이었다.
조국 산업화의 기초자금 US$ 많이 번 공로로 망한 셈이다.
99. 해사대학의 기초편찬 작업의 기회에, 후진들에게 뻔한 천기누설을 몇 마디 추가하자면,
* 동기들, 선후배들은 자산이고 배경이다
* 공부와 돈은 노년의 자유와 품격을 좌우 한다
* 인생에서 공부하고 돈 버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다
* 시간과 속도는 진급 축재 능력 박진감이며 생명이다
* Leadership의 어원은 "앞장 선 배"에서 유래되었다
* 공부, 일, 돈과 건강은 자기 인생에 대한 의무이고 예의다
* 노년에도 언제든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기를 놓친 변명일 수도, 세상물정, 건강을 외면하는 노추일 수도 있다
* 공부하고 일하는 것에 목숨 걸고 매진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 공부는 학교와 교과서 외에 미지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숙련도 포함한다
* 학교 졸업하면 실무에서 요구하는 것의 반에 반쯤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 학교 졸업 10년 후부터, 해기지식은 상식이 되며 표현력이 곧 실력이 된다
* 친지와 사적인 금전융통은 비록 잠깐일지라도 절대로 무조건 회피해야한다
* 해사대 졸업생들의 단점은, 기숙사와 국비교육 탓인지, 수동적 경향이 심하다
해사대학 70학번 항해학과 26기 양진국 (현 조광해운(주) 대표이사 회장)
- p.s.
이 원고를 제출하는 조건은
본문 중의 '사투리'와 문구 중에서 '줄 바꾸기'를 교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측단 여백을 채우지 않는 형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개인적으로,
문맥에 따라서 또 읽어 내려가는 호흡조절용으로
'줄 바꾸기'를 이용하여 단어/문맥이 짤리지 않도록 또 읽기 빠르게 이해하기 쉽도록
독자를 배려하는 목적으로 '줄 바꾸기'를 강조하는 문화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은
한국해양대학교 발행 바다에 남긴 자취 한국해양대교 실습선 75년사(1947~2022)에 게재된
글을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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