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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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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25-07-09 20:35 View46

본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약칭 아프가니스탄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이다.


내륙국으로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이다. 

다민족 국가로서 주류 민족인 파슈툰족을 비롯해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인, 아이마크인 등이 거주한다.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수많은 군사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정복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의 서방세력에 이른다. 

또한 쿠샨제국, 에프탈제국, 사만토후국, 사파르토후국, 가즈나제국, 고르술탄국, 할지술탄국, 무굴제국, 

호타크제국, 두라니제국, 기타 등등의 제국들을 일으킨 민족들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두라니 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두라니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제국과 러시아제국이 "The Great Game"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 

제3차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 1919년8월19일에 이 나라는 대영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자히르 샤의 40년 통치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를 유지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반란으로 내전상태에 빠졌으며 

1979년에는 소련이 친소련 성향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유지시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침공하며 

10년에 걸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무자헤딘으로 통칭된 반공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198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로도 아프가니스탄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2001년 시점에 탈레반의 이슬람 토후국이 영토의 85%를 장악하게 되었으나 

알카에다 소탕을 명분으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축출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탈레반과 정부군 사이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지속되며 새로운 내전에 돌입한다. 

2001년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안보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2020년부터 탈레반과 미국의 합의로 단계적인 미군철수가 시작됨과 함께 

탈레반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며 2021년 탈레반 공세) 

끝내 2021년8월1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고(카불 함락),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이 재건되었다. 

그러나 판지시르주 등을 기반으로 이슬람 공화국 충성파와 반탈레반 세력이 

조직적 저항을 이어가며 판지시르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정통 정부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농업과 목축업의 의존도가 높다.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1친억$ 규모의 전국적인 재건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어원

10세기에 쓰여진 지리서 후드드 알 알람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이란 어휘는 인종의 이름인 "아프간"만큼이나 오래 되었다고 한다. 

어근 "아프간"은 역사적으로 파슈툰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접미사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의 장소"를 뜻한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인들의 땅"으로 해석되거나, 더 면밀히 말해서는 "파슈툰인들의 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아프가니스탄 헌법에서는 

"아프간이라는 어휘는 모든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아프간을 명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수백년간 아프가니스탄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부영토였으며,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대이란의 동쪽접경을 이루고 있다.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만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 등 인도이란인들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제국,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과 소비에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슬람 이전 시대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아소카 황제의 포고령.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쓰여져 있다.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영역은 이웃 지역들과 문화, 교역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도시문명은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문디각 (칸다하르 인근의 남부 도시)은 인근의 인더스 문명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욱 최근의 발견들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지역에 고대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욱 자세하게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인도의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쇼투가이의 아무다리야강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러 작은 규모의 인더스 부락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바미얀 석불 중의 하나. 

이슬람 세력의 아프가니스탄 정복 이전에 불교가 널리 포교되었다.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의 반유목민이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그 중엔 절대다수의 인도이란어파를 사용하는 인도이란인이 있었다. 

이 종족은 이후에 더 멀리 남아시아, 서아시아, 또는 카스피해의 북부지역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 지역은 아리아나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인도이란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


나중에 파르티아와 사산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최대 판도. 기원전 180년경.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타어와 같은 고대 동부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메디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제국에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와 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제국이 숭가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러선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1세기경, 파르티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을 빼앗겼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 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서 지역 내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3세기에 쿠샨제국은 사산왕조에 격퇴당하였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사산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 

서기 557년에 사산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에 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다. 

지역의 북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이 계속하여 불교문화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과 몽골제국의 침공

헤라트 자마 마스지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들 중 하나다.

서기 642년 아랍계 무슬림이 헤라트와 자란즈 등지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아랍계 무슬림과 맞닥뜨린 일부 원주민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반발하였다. 

당시 인도문화권과의 문화적 관련성의 이유로 아랍인은 지역을 총괄하여 알-힌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고, 

시리아와 나나의 신봉자와 유대교인도 있었다. 

자란즈의 사파르계 무슬림 세력이 서기 870년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 힌두쿠시 남부로 이슬람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0세기의 가즈나인의 집권 이전까지 카불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였다고 전해진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흐무드가 남은 힌두교 지도자를 몰아내고, 

가즈나왕조를 세웠으며 카피리스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의 황금시대에서 이슬람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가즈나 왕조는 당시 이미 강력한 이슬람 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킨 고르인들에 의해 몰락한다.


서기 1219년, 징기즈칸과 툴루이를 비롯 그들의 몽골제국 군사가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의 군사는 바미안 뿐만 아니라 헤라트와 1220년 발흐 지역을 섬멸, 파괴하였다. 

몽골인의 파괴로 많은 주민들이 죽거나, 농촌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몽골의 지배는 북서부지역에서 일칸국으로 지속되었고 

할지 술탄국이 힌두쿠시 남부지역의 아프간 부족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1370년 티무르제국을 건국한 티무르가 지역을 정복한다.


16세기 초, 페르가나에서 온 바부르가 아르군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카불을 함락시킨다. 

그는 1526년에 델리를 정복하여 로디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무굴제국이 세워지게 한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는 부하라 칸국, 사파위제국, 그리고 무굴제국이 지역의 부분들을 지배한다. 

19세기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서부 지역은 호라산이라는 지역명으로 불렸다. 

호라산의 네 수도들 중 두곳 (헤라트와 발흐)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해 있었고, 

칸다하르, 자불리스탄, 가즈니, 카불리스탄, 그리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이 

호라산과 힌두스탄 사이의 변경지대였다.


호타크 왕조와 두라니 제국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독립시킨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1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미르와이즈는 1715년에 자연사하여 그의 형제 압둘 하지즈 호타크가 왕위를 물려받으나, 

곧 미르와이즈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가 반역죄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구나바드 회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1729년 담간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


두라니 왕조의 병사들.

두라니 제국을 건국한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국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1738년, 나디르 샤와 그의 군대(그 가운데는 4천명의 파슈툰족 압달리 씨족도 있었다)는 

마지막 호타크 요새였던 칸다하르를 정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가즈니, 카불, 라호르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감금되어 있었던 16살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풀어주고 아프간족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얼마 후 페르시아 군대와 아프간 군대들은 인도를 침공한다. 

1747년6월19일, 나디르 샤는 암살당하였는데, 이 일은 조카 알리 콜리의 음모로 말미암은 것 같다. 

나디르가 죽자 그의 부장이자 경호병이었던 압달리 씨족의 파슈툰족 아흐마드 샤 압달리가 

로야 지르가('대회의')를 요청하였다.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모여 아흐마드 샤를 새 통치자로 삼고, 

1747년10월에 대관식을 치렀다. 

아흐마드 샤는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창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임금이 된 아흐마드 샤는 자신의 칭호이자 씨족명을 '두라니'로 바꾸었는데, 

이 말은 '진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두르'에서 나온 말이었다.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와 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제3차 파니팟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들 중 하나를 거두었고 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굴복시킨다.

1772년10월, 두라니는 자연사하여 칸다하르 망토의 사당에 인접한 곳에 묻히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1793년에 티무르의 사망 이후로는 두라니의 왕위는 그의 아들 자만 샤가 이어받고, 

이후로 마흐무드 샤, 슈자 샤 등의 인물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아프간 제국은 19세기 초에 

서로는 카자르 왕조, 동으로는 영국의 지원을 등업은 시크제국으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라크자이족의 지도자 파테 칸은 제국 안밖에 21명의 형제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한다. 

파테 칸의 죽음 이후,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영토를 그들 사이에 갈라놓는다. 

이러한 격동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도스트 모하마드가 1826년에 자신을 왕족으로 선언하기 전까지 많은 임시 지도자들이 거쳐갔다. 

펀자브는 당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침공하였고 1834년에는 페샤와르를 점령한 란짓 싱에 빼앗겼다. 

1837년, 잠루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카이버 패스 인근에서 악발 칸과 그의 아프간 군사들이 시크 사령관였던 하리 싱 날와를 살해한다. 

당시 영국은 동쪽에서 진군해오고 있었고 "그레이트 게임"의 첫번째 주요 충돌이 착수되고 있었다.


서양의 개입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벌어진 1880년 칸다하르 전투 이후 

인도제국 병사와 아프간 국군의 모습.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방어벽은 나디르 국왕의 지시에 의해 1930년대 초에 철거되었다.

1842년 영국령 인도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아프간군이 승리한 후, 

영국은 아프간 정부와 수교하고 모든 군대를 나라 밖으로 철수시킨다. 

영국군은 1870년대 후반에 아유브 칸을 몰아내고 압둘 라흐만 칸의 집권을 돕기 위해 다시 돌아와 

2년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른다. 

이후 영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아프간의 외교정책까지 통제하였다. 

1893년, 모티머 듀랜드는 

당시 아미르였던 압둘 라흐만 칸이 파슈툰인과 발루치족의 관할지역을 듀랜드 라인으로 나누는 합의서에 서명하게 한다.


무함마드 자히르 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했던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왕이다.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라왈핀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아마눌라 칸 국왕은 아프가니스탄을 주권국이자 완전한 독립국으로 선언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적인 고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수교를 맺기 시작하며, 

이후 1927-28년 유럽과 터키의 순방에 나서는가 하면,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여러 개혁들 사이엔 마흐무드 타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초등교육의 의무가 명시된 1923 아프가니스탄 헌법 68조가 제정되게 하였다. 

노예제가 명시된 법은 1923년에 폐지되었다.


여성의 전통적인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거나 남녀공학의 교육기관을 세우는 등의 개혁은 

부족장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빠르게 소외되었다. 

압도적인 무장반란세력에 부딪혀, 

아마눌라 칸은 1929년1월,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이끌던 세력에 의해 퇴위당하였다. 

아마눌라의 사촌이었던 모하메드 나디르 샤 왕자는 

1929년 11월에 칼라카니를 굴복시키고 살해하며, 자신 스스로를 국왕 나디르 샤로 칭한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를 위해 아마눌라의 개혁을 단념하였으나, 

1933년 하자라족 출신의 학생 압둘 칼리크에 의해 암살당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이였던 당시 19세의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왕위를 물려받아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한다. 

자히르 샤는 1946년까지 그의 삼촌의 보조를 받아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그는 총리의 자리에 올라 나디르 샤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자히르 샤의 또다른 삼촌이었던 샤 마흐무드 칸은 

1946년에 총리직에 임명되어 더 큰 범위의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기 위한 실험들을 해 나갔는데, 

그의 예상보다 더 발전하자 정책을 무산시켰다. 

총리직은 1953년 국왕의 사촌이자 매부였던 무함마드 다우드로 교체된다. 

다우드 칸은 소련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였고,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고 냉전 시대에도 어떠한 세력과도 연맹을 맺지 않으며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은 상호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고속도로, 공항, 기타 기반시설을 지어 줌으로써 중립상태는 국가에게 이득이었다. 

1인당 기준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어떠한 국가보다 많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1973년,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순방길에 있었던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첫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하였다. 

어떠한 전문가들은 부토가 1978년4월 샤우르 혁명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도 해석한다.


공산혁명과 소련의 침공

 이 부분의 본문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및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입니다.


1978년4월 샤우르 혁명 때 무함마드 다우드 대통령과 그의 일가 가족이 모두 살해되고 

다음날 카불 아르그 대통령궁의 외경.

1978년4월,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이 샤우르 혁명을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공산정부에 반대하던 세력은 몇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는 곧바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무자헤딘이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에 대항하는 내전으로 발전한다. 

소련이 인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몇천명의 군사고문을 보내는 동안, 

파키스탄 정부는 반란군들에게 비밀훈련소를 제공하였다. 

그동안 인민당에서는 다수였던 칼크와 온건적인 파르참으로 계파가 나뉘어 마찰을 연이어 빚다, 

파르참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구실로 관련된 정부각료를 해고하고 군장교를 체포한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민주당의 군부인사는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인민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샤우르 혁명, 즉 위대한 4월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5월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민주당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민주당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


소련 침공 이전에 카불에 있던 여왕궁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당사로 쓰였다.

권력을 잡은 인민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5월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미국은 1979년 중반부터 파키스탄의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반소련 무자헤딘 세력과 아프간계 아랍인 전투원들을 지원해왔다. 

엄청난 양의 현금과 무기들, 2천개 이상의 FIM-92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키스탄으로 전달되었다.


1979년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국방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79년9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인민당 내부에서 칼크 동료였던 하피줄라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아민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소련은 아민을 불신하여, 1979년12월 소련 특수부대가 아민을 암살한다. 

이후 바브락 카르말이 소련이 양당인사를 모두 등용하여 구성한 정부를 이끈다. 

소련은 카르말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배치하나, 

아프가니스탄 내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관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었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협력 및 선린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12월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저항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이 살상당하였다. 

5백여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은 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소련은 계속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


내전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곳에서 1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레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레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절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과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2001년에 탈레반은 아편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


탈레반토후국과 북부연맹

1996년 말의 아프가니스탄 점유상태; 

마수드 점유 지역 (적색), 도스툼 점유 지역 (녹색)과 탈레반 점유 지역 (황색).


1994년 말 탈레반의 초창기에 이룬 몇몇 승리들은 엄청난 손실로 끝난 패배들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탈레반은 1995년 초 카불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북부동맹의 마수드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96년9월,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군사적 지원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또다른 주요 공격을 준비하였고, 

마수드는 카불에서 철수해야 했다. 

탈레반은 같은 달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토후국을 세웠다. 


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유사한 형태의 엄격한 샤리아를 도입하였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는 이와 같은 체제에 대하여 

"그 동안 세계의 어떠한 정권이나 체제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사실상 가택연금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제한 바가 없었으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거나 남성과의 동행 없이 의료진찰을 받거나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신체적 처벌행위로 금지한 사례가 없었다."라고 표명하였다.


탈레반에게 카불을 빼앗긴 이후에 

북부동명 지도자인 아흐메드 샤 수드와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북부동맹)을 형성한다. 

탈레반은 마자리샤리프 전투 (1997-98)에서 도스툼 세력을 패배시켰다. 

당시 파키스탄의 군 참모장이였던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탈레리반 북부연맹을 물리치는 것을 돕기 위해 몇천명의 파키스탄인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끌던 알카에다 네트워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동되었다. 


미국은 이 사실과 함께 100만명에 이르는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축출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였다. 

1990년부터 2001년9월까지 4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접전들에 의해 사망하였다.

2001년9월9일,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주에서 알카에다가 사주한 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자살공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이틀 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다. 

미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의 가해자로 지목하며, 탈레반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하자 2001년10월 작전명 항구적 자유작전이 실행되었다. 

최초의 침공기간 동안, 미군과 영국군은 알카에다 훈련캠프를 폭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해 북부동맹과 협력한다.


2001년12월, 구 무자히딘의 지도자와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구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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